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가 22일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강조한 일본의 `진실한 반성과 실행'은 여느 때에 비해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이 총리가 일본의 과거사 청산 방식 및 우경화 흐름에 대해 `쓴소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오히려 국내에서는 보다 더 강도높은 표현을 써가며 일본의 최근 행태를 비판했었다. 가령 "일본의 극우적 보수주의의 발호에 대해 장기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경제에 비해 외교가 낙후돼 있다", "서양에서는 개가 짖으면 짖도록 둬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등의 발언이 그렇다. 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정상 및 정상급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과거사 청산방식을 문제삼고 나선 것은 `일본 과거사 문제의 공론화'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 총리가 이번 정상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통치의 아픔을 경험한 나라들이 많다는 점에서 공감대 형성이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참석한 회의에서 연설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지난 7일 한일 외교장관회담에 이어 한단계 격상된 수준의 `항의'가 이뤄진 것으로도 풀이된다. 무엇보다 이 총리의 기조연설이 비중을 갖는 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이날 오전 `통절한 반성과 사과' 표명 직후 이뤄졌다는 점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연설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인 셈이다. 이 총리는 "과거를 왜곡하는 나라는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며 "과거에 대한 반성에는 진실성이 있어야 하며 또 반드시 실행돼야 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더이상 `말뿐의 사과'는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과거사규명→사과.반성→배상→화해'로 이어지는 4단계의 보편적인 과거사 청산방식을 언급한 것과 맥이 닿아있다. 당시 일본 지도층이 노 대통령의 발언을 `국내용'이라고 폄하한데 대해 결코 `국내용'이 아니었으며 일본의 `결자해지'(結者解之)는 필연적이라는 점을 재확인시킨 것으로 읽힌다. 실제로 최초 언론에 배포된 이 총리의 기조연설문에는 일본의 `진실한 반성과 실행'을 강조한 대목이 빠져있었으나 고이즈미 총리의 기조연설 직후 이 부분이 추가된 것은 한일간 문제를 말만으로 해결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총리는 또한 "20세기 식민통치의 과거를 가진 국가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과거를 미화하고 잘못을 은폐한다면 그 과거가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것"이라고 밝힌 뒤 "진실만이 과거를 평안하게 할 수 있다"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발언을 옮겨 눈길을 끌었다. 이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 기조연설을 위해 일본의 과거사 문제, 유엔 개혁 문제, 아시아-아프리카 신전략 파트너십 등 크게 3개 주제로 나눠 지난 20여일간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후문이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일 갈등이 꾸준히 변수로 작용해 왔으며 `일본'을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국제회의에서 특정 국가를 거론한다는 점에서 표현 수위 등을 놓고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총리는 이날 회의장에서 고이즈미 총리와 만나 별다른 대화없이 악수했다고 이강진(李康珍) 총리 공보수석이 전했다. (자카르타=연합뉴스) 김범현기자 kbeom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