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부품업체인 P사는 지난 가을 국내 공장을 모두 처분하고 중국 산둥(山東)성으로 사업장을 옮겼다. 이 회사 김모 사장은 7-8년전부터 중국행을 고민할 때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한국이 낫지"라고 주저앉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국내 근로자 한명의 월급으로 중국에서 10명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전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게 김 사장의 말이다. 국내 공장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건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일찌감치 전자레인지 생산라인을 해외공장으로 이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국내 생산을 전면 중단한 채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연간 600만대, 중국에서 150만대를 생산해 내수 및 해외 수출용 물량을 커버하고 있다. 중소기업, 대기업을 가리지 않고 기업들이 줄지어 산업현장을 떠나면서 산업공동화 현상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코트라에 따르면 지난달 현재 해외로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숫자는 모두 6천625개로, 코트라에 등록하지 않고 해외에서 영업활동을 하거나 현지사무소를 두지 않고있는 기업까지 합치면 해외진출 기업은 훨씬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재정경제부 집계를 보면 올 1-9월중 해외 직접투자는 2천842건에 55억2천만달러(신고기준)에 달해 작년 대비 건수로는 29.2%, 금액은 34.3%나 증가했다. 올해는 특히 1천만달러를 초과하는 대규모 투자가 두드러져 지난해보다 43.7%나 늘어났으며 전체 해외투자액의 절반을 훨씬 넘는 33억3천만달러는 제조업이었다. 문제는 이같은 기업 '엑서더스' 현상이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인천상의 부설 경제연구소 조사결과 남동 부평공단업체 1천181곳중 29%가 중국으로 공장 이전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중국과 한국 양쪽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들은 중국쪽 투자만 늘리고 있다. 전경련이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254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43.7%가 '국내 투자를 줄이고 중국 투자는 늘리겠다'고 대답한 반면 중국투자 비중을 줄이고 국내투자를 늘리겠다는 응답은 6.1%에 그쳤다. 이런 현상은 이웃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다. 전경련이 일본경제단체연합회 회원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중국투자를 늘리고 일본내 투자를 줄이겠다는 업체는 27.4%로 나타나 한국보다 산업공동화의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 따르면 생산시설을 해외 이전한 제조업체는 이미 7.2%를 넘어섰고 이전 계획이 있는 업체는 30.7%에 달하며, 앞으로 4-5년내 국내 산업공동화 비율은 55%까지 확대될 것으로 관측됐다. 산업공동화는 경제성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산업 구조조정 형태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주요 선진국에 비해 그 속도가 빠른만큼 설비투자 감소와 창업부진, 청년실업 증가 등의 부작용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지난 9월 전국 8대 도시의 신설법인 숫자는 2천103개로 8월의 2천336개에 비해 10% 감소했는데 이는 지난 99년 5월의 2천85개 이후 가장 적은 것으로 5년만에 최악의 창업부진 현상을 드러냈다. 설비투자 부진도 지속돼 산업은행이 전망한 내년 설비투자 증가율은 올해 31.2%에서 크게 감소한 9.1%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선진국의 경우 제조업 고용비중이 10-17% 하락하는데 30년 넘게 소요된 반면 우리나라는 불과 12년만에 8%나 하락, 파급속도가 선진국을 능가했다. 재계는 산업공동화를 막기 위해 불법 노사분규 엄단, 노동유연성 확대, 출자총액 등 각종규제 철폐, 준조세 부담 경감, 신산업 육성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경총이 최근 국내 주요기업 CEO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제조업 공동화의 원인으로는 '높은 임금'이 33%로 가장 많았고 '잦은 파업' 등 불안정한 노사관계가 27%, 각종 제도규제 과다 19%, 노동시장 유연성 부족 14%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에서도 기업이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임금 수준으로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들과 경쟁할 수 없는 만큼 고임금만을 탓할 문제가 아니며, 재계와 정부가 합심해 핵심기술 개발과 첨단 신산업 육성 등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내에서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핵심기술의 블랙박스화를 통해 높은 인건비 부담을 극복하고 기업 경쟁력의 원천을 철저히 파악해 대응하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밖에 탈공업화의 대책으로 서비스 산업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일과 중소.벤처기업 창업 활성화, 외국인투자 유치를 통한 공장이전 공백 해소, 부품.소재산업육성, 인력.노사.규제 등 제반환경의 기업친화적 조성 등도 시급하다. (서울=연합뉴스) 권혁창기자 faith@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