兪炳三 < 연세대 교수ㆍ경제학 > 교육은 국가의 미래이다. 평범하면서도 극히 중요한 말이다. 모든 것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 국가발전의 모든 면에서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그 동안 우리가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우수한 인적자원이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넉넉한 부존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국보다 특별히 우월한 경제력을 지니지도 못한 현실에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결국 인적자원뿐이다. 잠재성장률의 지속적 하락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첨단 기술력 개발을 선도할 수 있는 고급 연구인력 양성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첨단의 학문수준이 국내에 정착돼야만 한다. 한 국가의 포괄적 기술력은 내부적으로 자생적인 확대 재생산이 골고루 이뤄지는 단계가 돼야 자리를 잡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 학문 수준은 아직도 세계첨단 수준과는 거리가 있음이 현실이다. 일부 학자들이 세계적 수준의 연구업적을 낳고 있고 일부 기업이 첨단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아직은 제한된 분야에 국한되고 있다. 과연 학문수준이 첨단에 이르게 되는 데에는 몇 단계의 과정이 필요할까. 알다시피 유대인들의 학문수준은 세계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유명한 계량경제학자인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로렌스 클라인 교수도 유대인이다. 누군가가 이분에게 우리 나라의 학문수준도 그들처럼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분의 대답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한 나라의 학문이 세계 최첨단 수준에 도달하는 데에는 적어도 학문적으로 3세대가 걸린다. 1세대는 학문의 불모지에서 첨단 국가에 유학해 신학문을 습득한다. 그러나 첨단의 연구 업적을 내는 일은 드물다. 기본이 제대로 되지 못한 상태인데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궂은 일로 학비를 벌어가며 겨우겨우 하는 공부이니 학위를 따는 것만도 버겁다. 그러니 1세대에서 세계적인 학자가 나오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렵다. 오히려 이들의 역할은 귀국해 후학을 열심히 양성하는데 있다. 이들의 제자인 2세대는 신학문의 기본을 습득해 다시 유학을 간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달 수준'의 교육을 받았는지라 역시 최고수준의 학술활동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2세대의 대부분은 첨단의 학식을 제대로 갖추게 되고 소수이나마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게 된다. 3세대에 이르러서는 이윽고 세계 최첨단의 학자들이 다수 출현하게 되고 고도의 연구업적을 낳아도 국가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일은 되지 않는다.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학문수준에 이른 상태가 된 것이다. 학문발전의 3세대론(三世代論)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설명은 설득력이 매우 높아 보인다. 매 세대가 제 역할을 다하더라도 최소한 3단계는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학문 분야에만 국한된 얘기도 아닐 성싶다. 과연 우리는 어느 단계에 와있는가. 사람마다 판단이 다양할 수 있겠으나 대체로 우리는 둘째 단계쯤에 와있는 듯하다. 첨단의 학문 영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점차 늘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 그 그룹에 들지 못하기에 면구스럽긴 하지만 나라 전체로는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음 학문세대에서는 실제로 위 설명대로 발전할 수 있을는지가 매우 의심된다.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의 학력은 근래에 눈에 띄게 저하되고 있다. 언론에도 여러 번 보도돼던 일이다.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이 줄었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 원인으로 평준화 교육 말고는 지목할 것이 없다. 교육열이 국가경제의 막대한 추진력임이 분명한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국민적 고통이라는 아이러니의 산물이다.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커도 3세대론에 반하는 교육의 수월성을 희생하는 방안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러기에 새 입시제도에 대한 교육부 안은 크게 보완돼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