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은 지난 16일 러시아로 출국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방문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대통령의 공식 일정은 19일부터 시작됐지만 이 회장은 비행기편이 여의치 않아 사흘 먼저 떠났다. 비정규직 보호법안 등 국내 현안을 뒤로 한 채 23일까지 8일간 대통령을 따라다녀야 하지만 이 회장에게 주어진 일은 오찬이나 만찬장 한두 군데 참석하는 게 전부다. 함께 수행하는 경제 5단체장 중 대기업을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나 중소기업을 대변하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전국단위 상공인들의 모임인 대한상공회의소의 회장들은 한·러 재계모임 등 나름대로 역할을 찾을 수 있다. 무역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무역협회장도 끼어들 일은 많다. 하지만 노사관계에서 사용자를 대변하는 경총 회장은 딱히 할 일이 없다. 러시아에 가서 옛 사회주의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운동을 연구할 것도 아니다. 급변하는 러시아 경제의 노사관계를 들여다 보기에는 국내 현안이 더욱 급하다. 한·러간에 노무관리 대처 협력방안을 찾자고 돌아다닌다면 모스크바의 강아지들도 웃을 일이다. 누가 봐도 '들러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경총 회장은 단지 '경제5단체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수행명단에 끼였다고 한다. 지난해 5,6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을 각각 방문할 때도 당시 김창성 회장이 수행했었다. 지난 정권 때까지만 해도 경총 회장은 특별히 청와대로부터 요청받지 않으면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수행한 적이 없다고 한다. 청와대는 "언제 우리가 경제단체장들을 따라오라고 요구한 적이 있느냐"며 강제징발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 재계 인사들이 맘에 내키지 않는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왜 따라나섰을까. 재계를 옥죄는 분위기 때문이다. 정작 칼집에 넣어야 할 출자총액규제는 놔두고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집어넣으라고 호통치는 대통령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경총 회장으로선 만약 모스크바 만찬장에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경우 노 대통령이 노동자를 대변하던 시절 경총과 쌓은 악연이 더욱 찜찜해질 수 있다. 차라리 1주일여 비행기를 타고 호텔 방에 있으면서 잠시 행사장에 모습을 보이는 게 속이 편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참여정부 2년째인 지금 재계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 전경련 간부들이 사회주의 발언이나 재벌정책 비판발언 등으로 자리에서 쫓겨난 일.대통령이 규정한 경제위기 조장의 음모론.TV회견에서 특정 기업인의 치욕스런 일을 직접 거명한 일과 바로 뒤 그 기업인이 투신자살한 사건.편가르기와 거친 표현.대통령 말 한 마디에 납작 엎드린 여당 의원들. 재계 인사들은 "분위기가 이런데,어떻게 청와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느냐"고 불안해한다. 지난 5월 청와대에서 열린 노사정 대표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한 재계 참석자를 향해 "노동계가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하자고 하면 도끼들고 나올 줄 알았어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웃자고 해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목당한 당사자는 섬뜩한 도끼가 자신을 향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회장님,제발 쓴소리 좀 하지 마세요. 우리 회사가 피해를 입을까봐 걱정됩니다." 재계의 '미스터 쓴소리'로 불리는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은 두산그룹 임원들로부터 "제발 가만히 계셔달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고 한다. 기업인의 기를 살리는 분위기가 아쉽다. 정구학 산업부자창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