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노동운동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 곳은 독일이다.

지난해 근로시간 연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장기간 총파업까지 강행했던 독일 금속노조(IG메탈)가 올 2월 금속사용자단체의 근로시간연장 요구를 받아들인 이후 독일 노사현장이 급속히 바뀌고 있다.

금속산업은 물론 백화점 일반공무원들까지 근로시간 연장을 채택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 현장에서는 임금인상이 아닌 임금삭감을 놓고 노사협상이 벌어지는 정도다.

◆확산되는 근로시간 연장

현재 독일에서 임금 인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을 채택한 기업이 60여곳을 웃돌고 있는 것으로 국제노동재단은 집계하고 있다.

세계적인 전자업체 지멘스 노사는 지난 6월 임금 인상 없이 주당 40시간으로 근로시간을 5시간 늘리기로 합의했다.

회사측이 공장을 헝가리로 이전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노동조합은 근로시간 연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자동차 조선 등 다른 금속산업 기업들도 비슷한 양상.다임러크라이슬러 노사는 지난달 근로시간 연장과 임금 동결,비용 절감 등에 합의했고 폭스바겐은 현재 임금 동결을 놓고 노사협상을 벌이고 있다.

또 조선소인 호발트슈베르케는 주35시간에서 38시간으로 근로시간을 3시간 연장키로 했고 독일 연방공무원 30만명의 근무시간도 주당 평균 38시간에서 40시간으로 늘리기로 했다.

오펠 자동차,독일철도회사,트럭제조업체인 MAN,컨티넨탈 등도 근로시간 연장에 이미 합의했다.

규모가 작은 50여개 금속 관련 사업장 노사도 근로시간을 늘리기로 합의했다.

최근에는 관광,유통업체까지 근로시간 연장에 동참하고 있다.

독일 대형 여행사인 토머스 쿡은 최근 주당 근로시간을 기존 38.5시간에서 40시간으로 1시간30분 늘리기로 결정했다.

노사 양측은 회사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추가 근로에 따른 어떠한 수당도 적용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합의안도 발표했다.

독일 최대 백화점인 카르스타트켈레도 근로시간 연장을 추진 중이다.

이 회사 경영진은 전국 1백80개 매장에서 일하는 4만7천여명 직원들을 대상으로 추가 수당 없이 주당 5시간 더 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엔 16개 주정부도 공무원의 근로시간을 기존 38시간에서 40시간 또는 42시간으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배경은 역시 경기침체

무엇보다 경기 불황이 극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경색된 노동시장 구조로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세계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노조도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

여기에다 동구권 10개국의 유럽연합(EU) 편입이 사용자의 힘을 키우는 데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대부분 기업들이 동구권으로 공장을 이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가운데 강성 노동조합이 설 땅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반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짧은 근로시간 등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 때문에 유럽의 경제성장이 한계에 부딪쳤다고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최근 OECD의 통계에 따르면 1970년 이후 독일과 프랑스의 평균 근로시간은 각각 17%,23% 감소한 반면 미국과 캐나다는 오히려 2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웬만해선 해고되지 않는 '철밥통'과 주당 40시간 미만의 근무시간,각종 복지 혜택 등으로 '노동자 천국'으로까지 불리는 독일 노동계는 지금 근로시간 연장과 임금 억제 등 사용자의 요구사항을 잇따라 수용하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