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이부영(李富榮.62) 의장과 한나라당 김덕룡(金德龍.63) 원내대표의 '애증의 관계'가 새삼 정가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64년 한일국교정상화 시위를 이끈 `6.3세대'의 주역으로서 40년간 남다른인연을 맺어온 까닭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 문리대 동창이다. 김 대표는 60년 경복고를 나와 사회학과에입학했고, 이 의장은 이듬해 용산고를 나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 모두 아직 상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자제하고 있다.

이 의장이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의 선친인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에대해 연일 공세를 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 대표측은 24일 "80년대 재야시절에 같이 만나 괴로움을 많이 달랬다"며 "두사람은 사석에선 이름을 부르는 등 격의없이 지낸다"고 전했다.

여야간 과거사 공방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상생 회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대목에서다.

실제 두 사람은 이 의장이 오랜 재야생활을 접고 91년 민주당 부총재로 현실정치에 입문한 것을 계기로 정적이자 동지로서 협력과 견제를 거듭해왔다.

결국 97년 이 의장이 `3김청산'을 외치며 한나라당에 합류, 이회창(李會昌) 대선 후보를 지지하면서 둘의 관계는 접점을 찾는다.

하지만 이 의장이 지난해까지 6년간 한나라당에 몸담는 동안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연대와 반목을 거듭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김 대표는 99년 1월 당시 이 총재와 `신주류 연대'를 맺고 원내총무 경선에 나선 이 의장을 지지, 당선을 이끌었으나 이듬해 한나라당을 쪼갠 공천파동 과정에서이 총재 편에 섰던 이 의장과 갈등했다.

당시 김 대표는 "이 총재가 대권고지를 선점하려는 사당식 공천"이라며 공천파동 배후로 이 의장과 하순봉(河舜鳳) 의원을 지목, 사퇴를 요구했지만 이후 이 의장은 "군사혁명 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공천혁명"이라고 받아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들의 껄끄러운 관계는 2000년 4월 16대 총선 후에도 이어져 이 총재와 연대한이 의장은 당시 박근혜(朴槿惠) 의원과 비주류 연대를 맺은 김 대표의 반대를 꺾고5월 조기 전당대회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대선이 다가오고 `이회창 대세론'이 한나라당에 확산되면서 `큰 꿈'을꾸던 이 의장과 김 대표는 이 총재의 노선과 대여투쟁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다시손을 맞잡게 된다.

급기야 두 사람은 2001년 12월 민주당 정대철(鄭大哲) 김근태(金槿泰) 정동영(鄭東泳) 의원과 함께 `정치개혁을 위한 중진의원 협의회'를 결성하고 2002년 지방선거전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을 촉구, 개헌논의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두 사람은 특히 2002년 3월에는 당직을 사퇴하며 이 총재를 압박했는데 한가지흥미로운 점은 지금은 열린우리당 소속인 김영춘(金榮春) 안영근(安泳根) 의원이 당시 각각 김 대표와 이 의장의 참모였다는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 소속인 박계동(朴啓東) 고진화(高鎭和) 의원은 한때 `이부영계'로 분류됐던 의원들이다.

이와 관련해 이 의장도 "김 원내대표 뿐만 아니라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 옛동료, 후배와 얘기할 기회가 많을 것"이라며 "특히 김 대표 하고는 왜 얘기할 게 없겠고, 공통의 인식이 없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의장은 특히 자신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비서실장에 중도 성향의 정장선(鄭長善) 의원을 임명함으로써 중도노선을 걷고 있는 김 대표와의 관계설정에 파란불을드리우고 있다.

김 대표측도 "97년 신한국당과 민주당 합당 축하모임에서 민주당의 제정구 의원이 `신한국당에 김덕룡 선배가 계시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사말을 했을 정도로 이들 사이에는 정서적 공감대가 있다"며 대화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안용수 기자 jahn@yna.co.kr aayys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