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ㆍ15 광복 이후 60년이 가까워 오는 긴 세월 동안 정치ㆍ사회적으로 가장 큰 대립과 갈등을 빚어온 것이 소위 '과거사 청산' 문제다.

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곤 하는데 이는 굴절된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의 반민족 친일여부는 과거사 중에서 가장 큰 쟁점이다.

해방 후 민족정기를 바로 잡겠다며 제헌국회에 구성된 반민특위가 정치권의 압력과 친일파들의 방해로 도중에 와해되면서 친일파 척결이 미완의 역사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청산의 첫 단추가 애초 잘못 꿰어진 것이다.

그동안 휴화산처럼 내연하던 과거사 문제가 지난 정권이 저지른 인권침해와 불법행위까지 포함되면서 활화산으로 돌변해 버렸다.

더욱이 과거사 문제를 두고 정치권이 한치 양보없는 공방을 벌이고 있는 판에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전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과거청산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다루겠다고 강조하는가하면, 8ㆍ15 경축사에서는 국회 내에 과거사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해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아직도 친일행위나 국가권력의 불법행위가 상당부분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사를 정리하자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문제가 왜 정파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라 있을까.

여권은 '진실규명'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나라당은 '정략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색안경을 끼고 보니 그럴만도 하다.

앞으로 과거사 청산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어떻게 진행될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다.

뒤늦었지만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고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 바로 잡아가는 것이 국가와 국민의 책무일 터인데 사안마다 조정하고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너무 많아서다.

어쨌든 과거청산작업은 역사를 바로 세우면서 미래를 기약하는 진통임에 틀림없다.

이런 까닭에 과거사의 문제해결에는 몇 가지 사항이 신중히 고려돼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청산대상과 범위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명분에 치우쳐 무차별적으로 대상을 확대할 경우 청산작업의 정당성이 훼손될 우려가 높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해 공과(功過)를 교량(較量)해야지 한 측면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반민특위의 친일파 분류는 참고할 만한데 자진해서 활동한 사람인지 피동적으로 활동한 사람인지를 구분하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도 다시 세세히 명기했다.

둘째는 뒤늦은 청산시기를 감안해야 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와 중국 대만 등은 종전과 함께 민족반역자들을 법정에 세워 단죄했다.

감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당시의 분위기로 인해 국민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세월이 너무 흐른 탓에 사실관계 규명에 어려움이 따르고 연좌제에 대한 악몽으로 의외의 저항이 뒤따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셋째는 작금의 나라사정이다.

국내외 경제환경이 악화되면서 기업들은 투자를 주저하고 서민들은 실의에 빠져 있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왜곡하면서 팽창주의에 혈안이 되고 있으며, 주한미군 감축으로 한반도 안보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형편에서 과거사 문제로 국론이 분열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올바른 역사를 위해 과거를 정리하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전제가 있다.

국민들의 공감을 얻는 일이다.

아무리 명분이 선명하다 해도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거나 미래를 설명해 주지 못하면 헛일이다.

< youngbae@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