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가 일으킨 A급 태풍이 유럽대륙을 강타했다.

2004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04) 예선에서 스페인을 제치고 조 1위를 차지했을 때 그리스의 선전은 흔히 볼 수 있는 '변방의 바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바람이 지난달 13일 유로2004 본선 개막전에서 포르투갈에 일격을 가하자 거센 해일을 몰고온 돌풍이 됐고 이제 디펜딩챔피언 프랑스와 전승가도의 체코까지 침몰시키자 일약 메가톤급 태풍으로 바뀌었다.

스포츠 베팅업체들이 대회전 '언더독' 그리스에 매긴 우승 확률은 150대 1.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라트비아와 스위스 정도만이 그리스보다 약한 팀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제2의 히딩크' 오토 레하겔 감독이 '기'를 불어넣은 아테네 전사들은유럽축구사에 길이 남을 '그리스 신화'를 썼다.

그리스는 조별리그에서 포르투갈을 2-1로 꺾어 이변의 첫 단추를 꿰더니 스페인과 1-1로 비겨 결국 '무적함대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8강전에서는 프랑스를 침몰시켜 '아트사커 마에스트로' 지네딘 지단을 무릎꿇렸다.

급기야 그리스는 '빅5'가 탈락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체코마저격침하며 44년동안 들러리만 섰던 '아웃사이더'의 기적같은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전문가들의 혀를 내두르게 한 그리스의 힘은 물샐 틈없는 수비 조직력과 승부처에서 더욱 빛나는 집중력이다.

분데스리가 우승 제조기로 명성을 떨친 레하겔 감독은 쓰러질 때까지 뛸 수 없는 선수는 스타급이라도 과감히 제외하는 극약 처방으로 느슨한 B급 대표팀을 강철체력의 전사들로 변모시켰다.

팀을 맡은 초창기 2002한일월드컵 예선에서 핀란드에 1-5로 대패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던 레하겔 감독은 한때 '오대영' 감독이라는 오명을 딛고 월드컵 4강 신화를일궈낸 거스 히딩크 감독과 여러모로 닮았다.

안팎의 비난에 굴하지 않고 특유의 카리스마로 자신의 일정에 맞게 팀을 조련해유럽 강호들을 차례로 연파할 수 있는 체력과 조직력을 갖추게 한 것. 유로2004 이전까지 메이저대회에서 단 1승도 챙기지 못한 그리스와 한일월드컵이전까지 월드컵 본선 첫 승이 목마른 목표였던 태극호도 닮은 꼴이다.

4-4-2, 5-4-1, 3-4-3 등 다양한 포메이션을 소화시킨 레하겔 감독의 '무지개 전술'도 빛을 발했다.

극단적인 수비 전형의 5-4-1로 8강전까지 재미를 본 그리스는 체코전에서 예상밖의 공세 전환으로 볼 점유율을 50%에 육박하는 수치까지 끌어올렸고 이는 중앙수비수 델라스가 공격에 가담해 극적인 실버골을 낚을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았다.

레하겔 감독은 "거짓말같은 동화는 계속된다. 오늘 밤 우리 팀이 이뤄낸 일은믿을 수 없는 것"이라며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지혜롭게 체코의 공격을 묶었다. 값진 승리의 과실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옥철기자 oakchu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