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낙관론자. 미국 역대 대통령가운데 대표적인 낙관론자를 들라하면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을 단연 손꼽을 수 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옛 소련과 군비경쟁을 벌여 냉전에서 승리했고 공급 중시의경제정책인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로 미 경제를 회생시키는 등 두가지 업적을 이룬것이 특기할 만 하다. 그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8년동안 두번의 대통령 임기를 채우며 자신의 보수주의 이미지에 맞게 공화당을 개조했다. 그는 재임당시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의 붕괴를 주시하면서 국가 부채를 3조달러로 3배나 늘리면서 다른 초강대국과의 경쟁에몰두했다. 그는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부르며 군비경쟁을 벌였다. 그는 1980년 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가장 많은 나이인 69세때였다. 그는 취임 70일만인 1981년 3월30일 워싱턴의 한 호텔밖에서 존 힝클리의 저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총알이 그의 심장에서 1인치 빗겨나가는 바람에 암살을 모면하고 회복됐다. 힝클리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범행을저질렀다고 말해 정신병원에 수감됐다. 레이건은 4년뒤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 후보와 붙었으나 50개주중 49개주에서 승리, 손쉽게 재선됐다. 그는 대규모 군사력 증강을 명령해 소련을 위협했고 소련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7년 중거리 핵무기를 제거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레이건은 두번째 임기에서 레바논에 잡혀있던 미국인 인질들의 석방을 얻기 위해 이란의 도움을 추구하면서 이란에 비밀 무기 판매를 승인했다는 폭로가 나와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대금의 일부는 니카라과 좌익정부와 싸우는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됐다.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이었다. 경제면에서 그는 공급중시 경제학 이론을 선호해 세금과 사회보장지출을 삭감하면서 높은 인플레로 어려웠던 경제를 다시 움직여보려고 시도했다. 월스트리트는 레이거노믹스에 우호적으로 반응했고 경제는 다시 회복됐다. 그는 이란-콘트라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1989년 임기를 채우고퇴임했으며 당시 그는 현대적인 여론조사에서 퇴임하는 대통령으로는 가장 높은 인기도를 기록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위대한 웅변가로서의 비범한 그의 능력과 보통 미국인들을 사로잡는 독특한 능력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떠난 지 5년 뒤인 1994년11월 뇌세포를 파괴하는 불치병인 알츠하이머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당시 "내인생의 황혼으로 나를 인도할 여행"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중 가장 장수한 레이건은 마지막 10년을 은둔속에 살았으며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이 마지막까지 그를 돌봤다. 낸시 여사는 지난달 "로니(레이건의 애칭)의 오랜 여행은 마침내 그를 내가 더이상 닿을 수없는 먼 장소로 데려갔다"고 말해 그의 정신상태가 크게 악화됐음을 알렸다. 레이건은 일생을 통해 라디오 스포츠 아나운서, 영화배우, 텔레비전 배우, 제너럴 일렉트릭의 대변인, 캘리포니아 주지사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1911년 2월6일 시골인 일리노이주 탬피코에서 구두 세일즈맨 존 레이건의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레이건은 학교를 다니면서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딕슨고등학교 학생회장, 일리노이주 유레카 칼리지의 학생상원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32년 경제학과 사회학 학위를 얻어 졸업했다. 그는 졸업 직후인 1932년부터 37년까지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일한 뒤 1937년 할리우드에서 스크린테스트를 받아 워너 브러더스사와 영화배우로 7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26세에 첫 출연한 영화인 "사랑은 방송을 타고(LoveIs On The Air)"라는 영화에서 라디오 아나운서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47년부터 52년까지, 또 1959년부터 60년까지 두차례에 걸쳐 미국영화배우조합의 회장을 맡았다. 그는 1940년대말에는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조사하던 의회청문회에서 배우, 감독, 제작자, 작가 등 공산주의 성향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레이건은 1967년부터 1975년까지 두번의 임기에 걸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의 적자를 정부 고용과 복지, 사회보장 지출 등을 줄여 해결하려 했으며 그의 임기말에 주(州)의 경제는 번영하고 있었다. 그는 두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인 배우 제인 와이먼과의 결혼생활은 1940년부터 48년까지 8년간 계속됐다. 레이건은 1952년 역시 영화배우였던 낸시 데이비스를만나 결혼했다. 그들은 1957년 영화 `해군의 악녀'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워싱턴=연합뉴스) 김대영 특파원 kd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