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신용불량자 숫자는 98년 이전 1백50만명 수준에서 99년 2백30만명 수준으로 늘어난 후 2002년 상반기까지는 별로 변동이 없었다. 그런데 2002년 하반기부터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해 올해 1월 말 현재 3백72만명으로 6년 만에 2.5배가 되었다. 경제가 어느 정도로 안 좋아지고 있는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신용불량자 제도는 한 마디로 F학점 제도에 비유될 수 있다. 대출이나 카드대금 카드론 등을 3개월 이상 연체한 경우 종합신용정보 집중기관인 은행연합회로 통보된다. 이렇게 통보된 금액은 개인별로 합산되어 총액이 30만원을 넘거나 연체건수가 3건 이상인 경우 F학점이 부여된다. 물론 당사자는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된다. 금융거래에 제재가 가해지는 것은 물론 취업에까지도 지장이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금융거래를 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해 평소에 등급 내지는 점수를 매겨 놓고 대출 여부나 금액 결정의 자료로 활용한다. 말하자면 포괄적 점수 내지는 등급제다. 연체가 발생할 경우 점수나 등급은 떨어지겠지만 '신용불량자'라는 특별 용어까지 써 가면서 전과자 취급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제도가 독특하다. 평소에 점수를 매기지 않다가 F학점을 받는 순간 무거운 벌을 내리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효율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F학점을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식이나 친척이 F학점을 받을 지경에 이르면 온 집안이 힘을 합쳐 도와주는 협동의식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일종의 금융연좌제가 성립하므로 금융기관에는 유리할 수도 있다. 정부는 최근 배드뱅크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두 개 이상의 금융회사에 원금 기준 5천만원 미만의 빚을 지고 6개월 이상 연체한 신용불량자가 원금의 3%를 내면 신용불량자 지위를 벗어나고 연체이자도 유예된다. 나머지 돈은 연 5∼6%의 이자로 최장 8년 동안 갚으면 된다. 한 마디로 특별사면이다. 현재 F학점을 받은 3백72만명 중 약 1백80만명에게 F학점을 취소하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이 제도의 취지는 이해가 가지만 문제가 많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빚을 열심히 갚는 사람들을 실망시켜 빚 갚기를 게을리하거나 포기하게 하는 도덕적 해이 현상을 부추길 것이라는 점이다. 배드뱅크로 가겠으니 그 동안 갚은 돈을 돌려달라는 전화가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이러한 부분이 심각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최근 인터넷 포털 '다음'에는 3백여개의 신용불량자 카페가 생겨났다. 이 중에는 심지어 '불법 채권추심 사례와 대응방안'이라는 보고서까지 유통되는 카페도 있고 "채권 추심 담당직원을 화나게 하여 폭언을 유도한 후 녹음해 놓고 금감원에 통보하거나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위협하면 효과적이다"라는 식의 전략들도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빚을 안 갚으려는 시도가 집단주의화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특별사면의 실시는 '그러면 그렇지'하는 식의 사고를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번 조치가 일회성 특별사면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일단 실시된 이상 나중에 신용불량자가 또 늘어나면 전례를 들어 특별사면이 다시 행해질 수도 있다. 즉 특별사면의 일반화 현상의 시발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신용불량자 제도를 장기적으로 폐지하고 신용점수제를 구축하려는 정책이 현재 시행 중에 있지만 이 제도는 단기적으로 폐지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보이므로 잘 보완해 가면서 유지시켜야 할 것이다. F학점을 평소에 남발하다가 숫자가 늘어나니까 부랴부랴 F학점 숫자를 반으로 줄이는 특별사면을 실시한다면 신용불량자 제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향후 이러한 제도를 신뢰하고 따라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쓰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하필이면 총선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좀 더 천천히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할 배드뱅크 설립 같은 정책이 서둘러 발표되는 것을 보면서 생각나는 얘기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 chyun@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