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릿발 같기만 하던 정부와 금융감독당국의 `말'이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 금융계 최대현안인 LG카드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시중은행들은 전례없이 정부가 제시한 방향에 `반기(反旗)'를 든데 이어 외국계 은행들이 정부의 으름장에 아랑곳 없이 제갈길을 가면서 정부의 영(令)이 서지 않는 분위기다. 국책은행 노조 마저 들고 일어나자 정부가 부총리 명의의 LG카드 지원 협조공문(公文)까지 내려보내며 가까스로 반발을 무마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자사 이익에만 급급한 은행들의 태도가 얄밉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원칙과 정도에 충실하지 못했던 정부와 금융당국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리고 이해조정 능력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 정부 `말발' 안먹힌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최근 LG카드 문제에 `무임승차'하려는 외환.한미 등 외국계은행들을 상대로 고강도 압박작전을 폈다. "비협조로 LG카드 정상화가 무산된다면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이제와서 거부한다면 한국 금융당국에 대한 모독이며 정부로서는강력한 대응책을 강구할 것"(재경부 관계자)이라며 제재 가능성을 직접 경고했다. IMF 사태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흔히 보아왔던 `정부 압박-기업(은행) 백기'구도이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외환은행은 예고도 없이 심야 이사회를 열어 LG카드 지원안 자체를 부결시켰고한미은행은 절반(334억원 유동성 지원후 출자전환)만을 수용하는 `반쪽' 지원안을내놨다. "정말 애를 많이 썼다"는 당국자들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권위에 금이 가고 `외국계 봐주기' 논란만 불러 일으켰다. 이미 지난달초 LG카드 지원안 마련 과정에서 정부는 지원분담 규모를 둘러싼 채권은행간 이해 갈등을 매끄럽게 조정하지 못한 채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치이는 모습으로 스타일을 구겼다. 정부는 과거처럼 채권은행들을 상대로 전방위적 압박을 가했지만 주주이익을 등에 업은 은행들의 반발에 결국 지원안을 수차례 덧칠해야 했다. 앞서 정부는 8개 시중은행들에게 LG카드를 팔겠다며 연말을 시한으로 매각을 추진했지만 결과적으로 별무 소득인 채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됐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도 과거와는 달랐다. 일방적으로 덤터기를 쓰는 단독관리방안에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표했고 노조는 이사회 회의장을 점거하며 정부에 손실보전 확약을 요구, 부총리 명의의 협조공문을 받아내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 `덮고가기'식 미봉책이 원인 이런 현상이 LG카드 처리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자칫 다른 현안처리와 정책집행에도 악영향을 미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LG카드 사태 처리과정에서 정부가 채권단내 이해갈등을 적절히 조정하지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인 이후 금융계 내에서 `밀어붙이면 얻는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는 시대와 금융환경이 바뀌었는데도 과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안이하고 무원칙한 태도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게 금융계의 지적이다. 특정 현안이 불거지면 시장이 납득할만한 근본처방을 마련해 정공법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으로 미리 `답안'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은행들의 지원을 강제로 꿰어맞춰온 접근방식이 문제라는 것.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정부가 무작정 따라오라고 으르렁대고 있으니 문제는 풀리지 않고 오히려 무원칙한 대응으로 비쳐지고 있다"며 "개별은행이 가진 채권의 질, 지원여력, 대주주 동의 가능성, 시장과 여론의 추이 등을면밀히 따져보면서 설득을 하는 것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올바른 해법"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외국계 은행들은 단기차익에만 혈안이 된 투자펀드의 속성상 시장안정차원의 협조에 애초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자신들이 지원하지 않아도 어차피 판을깨기 어려울 것이라는 정부의 다급한 사정을 이용해 지원을 거부했다는 게 금융계의분석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압박'을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사정'을 한셈"이라며 "정부의 제재 경고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내 시중은행들의 경우 선도은행인 국민은행은 외국인 주주비율이 70%가 넘어서는 등 주주이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패턴이 급속히 바뀌고 있다. 따라서 시장안정만을 외치며 납득할만한 지원근거와 논리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 정부와 금융당국이 명분 싸움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의 LG카드 관계자는 "연체 전이율이나 대환대출 규모 등 회사의 부실상태조차 파악하지 않은 채 덮어놓고 채권은행장 회의부터 소집하는 관행이 문제이며 더이상 그런 식의 설득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제에 시장시스템 위기에 직결된 현안이 발생할 경우 정부당국이 `무늬'는 채권단 자율이면서 `내용'은 관치인 방식으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게 아니라 직접전면에 나서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여야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정부의 힘과 권위는 공정한 게임의 룰과 원칙을 세우고이를 엄격히 지켜내는 가운데 나온다"며 "작년 3-4월 카드채 사태 당시 시장원리에따라 1-2개 카드사를 퇴출시키지 않은 채 문제를 덮고간 것이 위기를 더욱 키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노효동기자 rhd@yonha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