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살던 지리산 근처, 밤이면 빨치산이 출몰하던 시절에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이 있었다. 잘못을 설명하려 들면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는 바람에 제대로 해명도 못하고 당할 때가 많았다. 6·25동란 때 우리 동네에 주둔하던 북한군들과 얼마간 함께 지냈지만 어릴 때라 그들이 정말로 말이 많았는지 기억이 없다. 10여년 전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 경제협력을 위해 공산주의의 본 고장 모스크바에 출장을 갔을 때 그들이 정말로 말이 많다는 것을 경험했다. 양국 재무장관 회담에서 우리 측의 질문에 대답이 하도 길어 두 시간 정도의 회담이었지만 관심사항을 제대로 논의도 못했다. 우리 측 기자들이 소련 재무부 장관과 인터뷰를 할 때는 한 마디 질문에 무려 45분인가 대답하는 바람에 질문 하나로 인터뷰를 끝내야 했다. 소련 경제계획 담당 부총리를 만났을 때는 우리 재무부 장관의 한 마디 서두에 무려 한 시간가량의 대답으로 면담을 끝냈다. 오래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하게 됐는데 북한 대표가 온다고 하여 정보기관으로부터 북한 사람들과 정치나 이즘에 대한 논쟁을 하지 말고 가벼운 얘기만 하라는 사전 교육을 받았다. 피나는 숙청과정에서 힘을 가진 자는 반대자를 제압하기 위해, 힘이 없는 자는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투쟁 속에서 살아온 그들은 말을 잘하고도 많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들이 오지 않아 말은 못해 봤다. 중국에 갔을 때 만난 어떤 기업인이 현지인들은 금방 보고 말하는데도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살아남기 위해 불리하면 무조건 부인하고 본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중국의 고위관리들도 소련보다는 덜했지만 말이 길고도 잘했다. 요즘 송두율 교수의 많은 말을 두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노동당원이 아니라고 했다가 노동당에 가입은 했지만 통과의례에 불과했다고 하고, 김철수가 아니라고 했다가 김철수라는 가명을 쓰는 것을 알고 송두율로 쓰라고 항의했다고 하고, 황장엽씨의 증언을 부인하고 정치국 후보위원은 아니라고 했다가 서방 정보기관의 물증이 나오고 김일성 김정일과 찍은 사진이 드러나자 후보위원으로 선정된 것을 사후에 알았지만(?) 후보위원으로 통보받은 적도 활동한 적도 없다고 하고, 몇 년간 1년에 2만~3만달러의 돈은 받았지만 공작자금이 아니라 학술연구자금이라고 했다. 그의 업적이라는 '내재적 접근법'으로 보면 그가 말했듯이 노동당에 입당한 1973년은 남쪽은 암울한 유신체제였던 반면 북쪽은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라로서 평가받고 있어 학문적 탐구를 위해 북을 방문했을 수도 있고, 정치국 후보위원이 된 후의 활동은 적극적인 이적행위가 아니라 '경계인'으로 통일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쪽의 경제사정이 월등히 좋아진 지금 그가 말한 "한국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의 새로운 삶"도 남북의 '경계'를 맴도는 기회주의적인 수사로도 들린다. 독일 국적이라고 독일 대사관을 찾아가 더 그렇다. 자기 저서에 김철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쓴 것을 보면 치밀하지도 못하다.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는 '내재적 접근법'도 서독 루츠(Ludz) 교수의 '내재적 동독 접근법'과 같다고 하니 학문적 업적도 훼손되고 있다. 어떤 정치원로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이 이상한 '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원래 잘 속인다"고 했는데 이런 선입관을 지우는데 그의 말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됐다. 앞으로 잘 하겠다"는 정도의 두 마디로 충분했다. 그랬으면 분단의 비극으로 포용할 수도 있었고, 그를 민주인사로 믿었던 많은 사람들을 덜 곤란하게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잔혹한 숙청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그가 왜 필요 없는 말을 많이 하여 남북 모두에게 미아가 됐는지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