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名不虛傳)-.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의 연설 솜씨는 소문대로였다. 작지만 당찬 체구에 흔들림 없는 자세, 강렬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를 능란하게 교차시켰다. 청중들은 환호했고 때론 숙연했다. "브라질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노조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같은 기업인들"이라고 열변을 토할 때는 1970년 불과 25세의 나이로 전국 금속노조 파업을 주도했던 모습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40만~50만명의 공무원 노조원과 노동자 농민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결코 파업에 굴복할 수 없다"며 다시 한 번 개혁 의지를 다졌다. 한국경제신문 취재진은 지난 9일(한국시간) 수차례 접촉 끝에 어렵사리 대통령 공보비서실의 취재 허가를 얻어 룰라 대통령을 8시간 동안 동행 취재할 수 있었다. 시크 공보관은 "외국 언론이 룰라를 동행 취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귀띔했다. ----------------------------------------------------------------- 오전 10시, 브라질 상파울루의 국제 전시장인 빠삘리옹 도 아네임비. 남미 특유의 따스한 겨울 햇살이 포도에 부서지는 가운데 브라질 최대의 신발ㆍ가죽 전시회인 '푸랑카오'가 열리고 있었다. 수백명의 인파가 입장을 마치자 개막식 행사로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됐다. 수백명의 제조업체 대표들을 모아놓고 축사에 나선 룰라의 일성은 "지금 브라질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정부, 노조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같은 기업인들"이라는 것. 룰라는 "기업들이 수출을 늘리겠다면 정부는 적극적으로 돕겠다"며 "환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만 빼고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하겠다"고 말했다. 외채상환을 위해 무역흑자 기조를 국가 아젠다로 설정한 룰라는 이날 한 업체로부터 구두를 선물받은 뒤 "이 구두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수출 확대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올 하반기에 아프리카를, 내년엔 중국 인도 러시아를 방문하겠다고 덧붙였다. 신발은 브라질의 수출전략 품목이다. 생산은 세계 3위, 수출은 6위권이다. 룰라 정부는 지난 상반기에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를 걸어 1백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했다. 반기에 1백억달러 흑자를 돌파한 것은 최근 10년만에 처음이다. 룰라는 기업인들에게도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했다. 자신이 앞장설테니 신흥시장 개척에 과감하게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연설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자 국정 아젠다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룰라는 "지금 인플레이션이 다소 진정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며 "나라 경제가 성장해야 하고 더욱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기회도 포기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연설 말미에 룰라는 마침내 마음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대통령의 상파울루 방문에 맞춰 가두 시위에 나선 공무원 노조를 겨냥한 것이었다. 룰라의 전통적 지지층이었던 공무원 노조는 룰라 정부가 연금 대폭 축소를 골자로 하는 연금제도 개혁법안을 의회에 상정시키자 집단으로 반발하고 있다. 현재 브라질 공무원들의 연금은 파격적이다 못해 기형적이다. 예를 들어 판사가 45세에 퇴직할 경우 그가 죽을 때까지 받게되는 연금은 놀랍게도 월 1만2천달러(미화 기준)에 달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3천달러를 넘지 않는 브라질의 사정을 감안하면 연금제도 개혁이야말로 빈부격차 해소와 건전한 재정확보의 핵심인 셈이다. 룰라는 이날 공무원들의 데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위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인 동시에 권리다. (단호하게) 하지만 데모로 인해 대통령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웃으며) 물론 개혁법안을 다루는 공무원들이 파업을 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지만." 전시장을 빠져 나온 룰라는 호주에서 직수입한 홀덴사의 오메가를 타기 전까지 20여분간 지지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룰라의 오후 일정은 상파울루에 새로 들어선 초현대식 호텔 우니키에서였다. 새 정부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인 '포미 제로(굶주림 제로)' 행사였다. '하루 세끼 밥먹이기'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룰라는 지난 1월 1백50만명의 빈민 가정에 월 15달러의 식료품 구입용 전자카드를 지급하겠다는 기아퇴치 정책을 발표했었다. 현재 브라질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 1억7천만명의 30%에 육박하는 5천만명. 특히 가뭄에 시달리는 브라질 북동쪽의 피아우이 지역주민 1백50만명은 아사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이날 행사는 정부 재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기업과 부유층에 도움을 호소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행사의 명칭은 '아포이오 포미 제로(기아 퇴치에 손길을)'이었고 같은 이름의 협회가 결성됐다. 초대 협회장은 룰라 대통령의 부인인 마리자 리치시오 여사가 맡았다. 포드 텔레포니카 등 1백명의 현지 기업대표들이 후원을 약속한 가운데 인사말에 나선 룰라는 자신의 경험담부터 소개했다. "1980년대 파업 주동혐의로 감옥에 갇혀있던중 교소도 측으로부터 어거지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갖은 핍박을 견디다 못해 나는 1백일 단식으로 맞섰다. 그 때 나는 비로소 굶주림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알았다." 그러면서 룰라는 "지금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들을 형무소에 보내 밥을 먹이는 것 보다 훨씬 돈이 덜 든다"고 정색하고 말했다. 굵은 바리톤성 저음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자리는 숙연해졌고 행사 시작전 잠시 일었던 사교장 분위기도 사라졌다. 룰라는 "빈민들에게 단순히 먹을 것을 주라는 얘기가 아니다"라며 "그들이 제대로 일자리를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후원자들에 대한 룰라의 '엄격한' 연설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룰라는 후원자들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고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지금 여기 모인 분들의 재산을 계산해 보니 후회가 든다. 지난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차라리 협회장 선거에 나갈 걸 그랬다." 좌중엔 박장대소가 터졌고 룰라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유럽순방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의 정상들에게도 협조를 요청하겠다"는 얘기로 끝을 맺었다. 이날 상파울루에서 2개의 행사를 치른 룰라 대통령은 시종일관 경제의 중요성과 기업의 역할을 강조했다. 범정부적 개혁과제도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가는 곳마다 공무원 노조의 시위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의 개혁을 지지하는 기업인과 일반 국민들의 목소리도 더욱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상파울루=조일훈ㆍ강은구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