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불황의 덫에 걸린 일본 경제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세가지 키워드는 금융 불안과 디플레, 인구감소다. 천문학적 숫자의 은행 불량채권을 진원지로 하는 금융 불안은 일본경제의 국제적 신인도를 깎아내리고,일본발 대공황 시나리오에 힘을 실어준 고질적 환부로 지목돼 왔다. 불량채권의 심각성은 미즈호,미쓰비시도쿄 등 일본 7대 은행그룹의 2002 회계연도 결산실적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들 그룹이 털어낸 불량채권 상각액은 5조2백80억엔으로 전체 당기순손실 4조5천8백79억엔을 월등히 웃돌았다. 본업에서 아무리 순익을 남긴다 해도 불량채권이 버티고 있는 한 은행들은 꼼짝없이 적자에 묶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7대 은행그룹이 5조엔 이상을 털어내고도 남은 불량채권은 20조엔 규모에 이르고 있다. 은행들의 불량채권이 대출채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를 훨씬 상회하고 있으며 최고 12.7%(UFJ신탁은행)에 이르는 곳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은행들이 불량채권 환부를 도려내고 클린 뱅크로 거듭나지 않는 한 금융불안 해소와 산업 경쟁력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일본 정부가 논란을 무릅쓰고 리소나은행그룹의 경영정상화에 1조9천6백억엔의 공적 자금을 투입키로 결정한 것은 불씨가 다른 데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음을 보여준다. 금융 불안이 일본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내부의 시한폭탄이라면 디플레(물가하락)는 성장 에너지를 잠식하는 거대한 맞바람이다. 잔뜩 오그라든 민간 소비와 산업 활동은 물가를 끌어내리고,이는 기업 수익과 근로자 소득 감소로 이어지면서 일본 경제를 마이너스 성장의 늪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은 2000년 34만1천3백엔에서 2001년 33만2천6백엔으로 감소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32만8천7백엔까지 떨어졌다. 소비자물가는 2000년 0.5% 하락한 이후 3년 연속 뒷걸음질치며,지난해에는 0.6%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문 닫는 회사가 줄을 이으면서 실업률은 고공행진(5.4%)을 지속,직장을 잃은 근로자는 올 4월말 현재 3백85만명으로 사상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마이너스를 향해 달리는 가운데서도 플러스를 유지했던 실질 GDP성장률이 올 1·4분기중 제로(0)로 급락한 것에 주목,경제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하고 있다. 디플레 기조가 바뀌지 않은 데다 해외 수요 부진과 이라크 전쟁,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후유증이 겹치면서 위기의 골이 더 깊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디플레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인플레 타깃을 설정하고 여기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해 온 요시다 히로시 도쿄대 교수는 "새로운 수요 창출에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본 정부의 정책 전환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디플레이션 극복에 최대 장애가 될 요인중 하나로 인구감소를 지적하고 있다. 생산 현장을 지킬 젊은 인력과 청소년 인구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소비 투자 고용 재정 등 모든 부문에서 일본 경제가 상당한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야마가키 도시히코 스미토모생명종합연구소 수석연구원은 "90년대의 불황은 생산활동 인구감소도 한 원인이었다"며 "인구가 감소세로 돌아서는 2006년 이후가 더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