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제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자그마한 어촌마을 이장님 댁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다. 육지에서 귀한 손님들이 왔다며 팔순의 할머니가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손수 저녁상을 차려 주셨는데 기겁을 하고 말았다. 태연한 척 하려고 노력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에 놀라 제대로 식사를 마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미역국이 가장 특이했다.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수저로 휘휘 젓다가 납작하게 누워있는 생선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만 수저를 놓고 말았다. 해안가에서 자라신 분들이라면 모를까 비린내가 폴폴 풍기는 국물을 떠넘기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비위가 아니라면 견뎌내기 힘든 독특한 맛과 향.이처럼 제주의 음식들은 특이하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각종 해산물들이 제주에서 매일 전국으로 직송되고 있다. 입맛 없는 계절.서울에서 만끽하는 제주의 봄을 소개한다. ◆진사댁(마포구 용강동,02-715-9605)=장안에서는 유일하게 제주해산물로 떡 벌어지게 한 상 차려내는 고풍스런 한정식 집. 인테리어로 장식한 골동품들에 눈을 빼앗겨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미역국이 한사발 상위에 올라있다. 회를 뜨고 남은 갈치뼈를 우려 국물을 낸 미역국은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제주의 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시원스레 입안을 환기시키고 나면 갈치 고등어 방어회가 한접시 뒤를 잇는다. 한정식 집이라고는 하지만 제주물항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횟감이 유난히 싱싱하다. 하얀 속살의 갈치가 쫄깃하게 씹히고 벌건 살이 탐스러운 고등어 회는 기름기가 적당해 양념장을 찍어 입에 넣는 순간 녹아버린다. 방어도 탱탱한 육질을 자랑한다. 미디움으로 조리한 로스 편채는 야채와의 어울림이 좋고 바삭하게 구워진 녹두전이 혀를 즐겁게 한다. 대관령에서 겨울을 지낸 황태구이는 양념 맛이 뛰어나 젓가락질을 바쁘게 하고 '삼합'의 묵직한 뒷맛은 전문점에 버금가는 힘을 느끼게 한다. 더해지는 홍어회 무침에 취할 즈음 별미 중의 별미인 갈치조림과 고등어 구이가 상위에 오른다. 깊숙이 간이 밴 갈치와 무는 칼칼한 고소함 때문에 저절로 밥공기에 손이 간다. 정신을 놓고 갈치조림에 탐닉하다보면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 구이와 속이 꽉 찬 간장게장을 놓치기 쉬운데 밥을 추가해서라도 꼭 먹어보아야 할 진미임을 강조하고 싶다. 누룽지와 된장찌개까지 싹싹 비우고 나면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을 정도로 나른해진다. ◆바당골(용산구 남영동 해태제과 옆,02-798-2133)=자그마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닷내음이 진동한다. 벽은 온통 제주의 먹거리며 자랑거리들을 취재한 신문기사들로 빼곡하다. 제주가 고향인 주인의 자부심이 강하게 전해진다. 눈을 돌려 메뉴판을 한번 훑고 나면 깜짝 놀랄 메뉴를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전국을 통틀어 갈치국 한그릇을 5천원에 팔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현지에서도 7천∼8천원은 주어야 먹을 수 있는 것이 갈치국인데 이 집은 좀 심한 편이다. 처음 이 집을 찾았을 때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먹어 보았던 갈치국은 제주 현지의 맛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갈치를 토막 내 두덩어리를 깔고 파릇한 배추와 단 호박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넣은 다음 새우젓과 고추로 맛을 살린 뚝배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넘칠 정도로 펄펄 끓는 국물을 후후 불어 한모금 마시면 속을 타고 내리는 시원함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배추며 새우젓 그리고 고추에서 배어 나온 향긋함과 칼칼함이 비린내를 원천봉쇄하고 갈치 특유의 고소함만을 부각시킨다. 이 집의 또 다른 인기메뉴는 모듬회.제주를 대표하는 고등어 돔 갈치 등의 생선을 내놓는데 선도가 좋고 썰어 내는 솜씨도 노련하다. ◆제주뚝배기(서초동 교대역 9번 출구 외환은행 골목,02-588-0207)=서초동 법원 근처는 까탈스러운 미식가들이 많은 탓에 웬만한 실력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운 동네다. 빌딩의 2층에 위치하고 있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입 소문으로 탄탄하게 단골들을 확보하고 있는 이 집은 성게 국이 주특기다. 회나 구이,조림 등도 많이 찾지만 입맛을 잃은 인근 샐러리맨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성게 국은 한눈에 보기에도 푸짐하다. 짙은 녹색의 미역과 오렌지색의 성게 알은 시각적인 대비가 뛰어나다. 미역국 속에 성게 알을 몇 점 올려주는 엉성한 모양새와는 판이하게 다른데 국물에 오렌지 빛이 물들 정도로 성게의 양이 푸짐하다. 성게는 산 것으로 먹으면 들풀 향과 달달한 비릿함이 전해지는데 미역과 함께 국을 끓이면 특유의 향은 유지되면서 비린 맛은 사라진다. 제주뚝배기의 성게 국은 국물이 진하고 개운한 것이 특징이다. 별도로 준비한 다시마 멸치 육수가 베이스로 쓰이기 때문이다. 쫄깃한 미역과 스르르 녹는 성게알을 건져먹고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면 잃었던 봄 입맛이 다시 살아난다. 건더기가 많아 자박하게 느껴지는 제주식 성게국 맛을 제대로 재연하고 있다. 김유진·맛 칼럼니스트·MBC PD showboo@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