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초겨울 2백47명의 한국 청년들이 '파독(派獨)광부'라는 신분으로 낯선 독일(옛 서독) 땅을 밟았다. 이들은 4백~5백마르크(당시 6천여환)의 월급을 받으며 지하 8백~1천m의 갱도에서 하루 8시간씩 목숨을 건 작업을 했다. 한국 정부는 '검은 눈물'로 젖은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1억5천만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근대화를 앞당겼다. 지난 77년을 마지막으로 모두 8천3백95명의 젊은이들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40년이 흐른 현재 노동 수입 국가로 입장이 뒤바뀐 한국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고 있다. 불법체류자 수가 30만명에 육박하는 가운데 고용허가제 전면 도입이냐, 아니면 기존 산업연수생제 보완이냐를 놓고 산업계와 노동계 시민단체 심지어 정부 부처 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당초 이달 말로 예정됐던 불법체류자 전원 강제출국 시한이 8월 말로 연기되는 등 외국인력 정책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지난 70년 파독 광부로 독일에 건너갔던 김희일 한독문화교류협회장(61)이 8년째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라주씨(33.방글라데시)를 만나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눴다. ▲ 김희일 회장 =라주씨를 보니까 젊었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 라주 =의정부의 한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프레스 일을 하고 있어요. 아마 한국에서의 30번째 직장일 것입니다. 하루 13시간 일하며 한 달에 1백20만원을 받고 있어요. 한국인 근로자 임금의 70∼80% 수준이죠. ▲ 김 회장 =난 지난 70년, 그러니까 28살 때 독일에 갔어요. 대학을 졸업한 뒤 일자리를 찾던 중이었죠. 우연히 해외광부 모집광고를 보고 그냥 돈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지원했어요. ▲ 라주 =탄광에서 일한 경험은 있었나요. ▲ 김 회장 =아니요. 그냥 모래 가마니를 들었다 놓는 시험을 통과한 뒤 얼마 안돼 독일로 갔어요. 산업연수생 신분이나 마찬가지였죠. 당시 독일은 경제호황으로 노동력, 특히 광부와 같은 3D업종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거든요. ▲ 라주 =지금의 우리(외국인 노동자) 처지랑 꼭 닮았네요. 현지 생활도 힘들었겠죠. ▲ 김 회장 ='아차' 싶더라고요. 그렇게 힘든 일인줄 몰랐거든요. 처음 몇 개월은 가족이 보고 싶어 매일 울다시피했어요. 식비를 아끼려고 동료들과 소머리 하나를 사다가 한 달 내내 끓여 먹은 국맛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 라주 =노동 수출의 역사를 가진 한국이 왜 외국인 노동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그냥 묻어버리고 싶은 아픈 기억이기 때문인가요. ▲ 김 회장 =글쎄요. 산업연수생제를 시작한게 93년이니까 외국 인력이 국내에 온 건 10년 정도네요. 역사가 짧은 만큼 아직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리 노하우가 부족한 것 아닐까요. 이민국가인 미국을 제외하고 불법체류자를 암묵적으로 인정해온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거예요. ▲ 라주 =그런 우유부단한 정책이 결국 외국인 불법체류자 수를 늘린 근본 원인이 아닐까요. 뒷돈을 주고 한국에만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와서 강제출국 운운하다니요. 효용가치가 다 떨어진 상품을 그냥 내다버리는 식 아닙니까. ▲ 김 회장 =라주씨도 이번 강제출국 대상이었겠군요. ▲ 라주 =예. 이달 말까지 자진 출국을 조건으로 작년에 불법체류 신고를 했어요. 다시 5개월 연장해 준다는데… 저희 예상대로였어요. 얼마 동안만 버티면 강제출국 방침도 다시 흐지부지될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 김 회장 =신문에서 보니까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인 고용허가제 관련 법안도 각계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 통과가 불투명하다던데. 8월 이후에라도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 있나요. ▲ 라주 =전혀요. 수십 만명이 한꺼번에 빠져 나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던 일은 누가 합니까. 길거리에서 우리만 보면 명함을 내밀며 찾아오라는 공단 중소기업 사장들은 또 어떻게 하고요. ▲ 김 회장 =일시에 모든 불법체류자를 다 내보내겠다는 발상부터 문제가 있어요. 우선 단계적 출국, 재입국 보장 등 구체적인 보완 대책이 시급한 때라고 봅니다. ▲ 라주 =가능하다면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어요. 한국의 중고 산업설비를 방글라데시에 수출하면 돈벌이가 될텐데…. 언젠가는 꼭 도전해볼 것입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