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알 안쪽에 묻은 눈물방울은 벌써 얼어버렸다.


입김마저 그대로 얼음알갱이가 돼 뚝 떨어질 것 같다.


도대체 몇도나 될까?


귓전을 때리는 세찬 바람에 마음까지 얼얼하다.


백지를 촘촘히 펼쳐 놓은 듯 길과 길 아닌 곳을 구분할 수도 없는 새하얀 눈밭.


그저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남겨 놓은 깊은 발자국을 되짚으며 걸음을 옮긴다.



짙은 선글라스에 털모자를 뒤집어 써 나이를 짐작할수 없는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진다.


'이 추위에 무슨 고생이람?'


낭랑한 목소리의 한결같은 대답은 "눈이 좋잖아요"


그리고는 바로 옆 눈더미에 털썩 대자로 누우며 '러브 스토리'를 찍는다.


다른 한쪽에선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여러명이 시합을 하듯 커다란 플라스틱 썰매에 앉아 냅다 아래쪽으로 내달린다.


사막의 모래 처럼 바람에 쓸린 눈가루가 썰매자국을 덮어 금세 아무도 타지 않은 새로운 눈썰매장을 만들어 놓는다.


어느새 추위는 간곳 없다.


막힌 곳 없이 탁 트인 하얀 세상에 가슴이 후련하다.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갔던 지난 5일 삼양대관령목장을 찾았다.


삼양대관령목장은 해발 8백50~1천4백70m 고원지대에 조성된 동양 최대규모의 목장.


여의도의 7.5배인 6백만평의 드넓은 산지에 4백50만평의 초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 끝없이 펼쳐진 초지를 하얗게 바꿔 놓는 설경은 '눈의 나라' 대관령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대박을 터뜨린 많은 영화와 TV드라마 촬영장소이기도 해 젊은 연인과 가족단위의 스크린투어 목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목장 일주거리는 22km.


자동차로도 2시간이나 걸린다.


눈이 많은 요즘은 1단지 꽃밭재쪽 길에 사람들이 몰린다.


목장입구 매표소에서 안내서를 받고 내려가면 목장사무실이 있는 광장.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내 어디서 본 듯한 공간을 접한다.


은서와 준서 나무가 있다.


TV드라마 '가을동화'속 두 주인공의 체취를 느낄수 있는 곳이다.


제주도의 오름 처럼 봉긋 솟은 둔덕 위에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푸르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와 눈이 만들어 놓은 하얗고 부드러운 곡선이 사진기를 들이대게 만든다.


아랫쪽은 눈썰매장.


오르내리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조금 더 올라 1단지 축사를 지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수분이 빠져 단단하게 굳어진 눈밭, 거칠 것 없다는 듯 휘몰아치는 바람, 잎을 떨군채 서 있는 나무들이 폐허를 연상시킨다.


아래쪽과 위쪽의 풍경이 이렇게 다를수 있을까.


멀리 선자령까지 한눈에 잡히는 시선을 위로 향한다.


올겨울 눈이 내린 이래 사람의 발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것 같은 눈둔덕이 이어진다.


왼편으로 돌자 거대한 눈더미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꼭대기에는 나무 한그루뿐이다.


영화 '연애소설'의 한장면을 찍었던 곳.


뒤따라온 한 가족의 아이가 동해쪽을 향해 가슴을 젖히고 힘껏 소리를 내지른다.


돌아보는 아이의 눈에 새겨진 눈부처의 윤곽이 선명하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시원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순간 열린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햇살은 눈색의 이미지를 바꿔 놓는다.


하얀색은 더이상 순박, 순결의 그것이 아니다.


화장 안한 시골처녀가 갑자기 은가루 화장품을 바르고 잠자리날개 옷으로 성장한 채 다가서는 듯 화려하고 요염하다.


한걸음 더 가면 동해전망대.


동해와 목장전경이 통쾌하게 펼쳐진다.


2단지쪽은 사람들이 뜸하다.


연인끼리 오붓한 산책을 하기에 좋겠다.


들머리에는 은서와 준서가 밀월여행을 즐겼던 별장이 눈속에 파묻혀 있다.


이 길의 설경 역시 1단지쪽에 못지 않다.


2단지축사와 소황병산(출입이 어렵다) 갈림길 주변의 설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이곳에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드라마 '야인시대' 촬영장이란 팻말이 서 있다.


다시 처음 눈길 걷기를 시작한 광장.


시끌벅적하다.


설피를 신고 눈이 많은 곳을 찾는 여성관광객, 바퀴 대신 썰매를 단 달구지에 오른 아이들, 시베리안 허스키가 끄는 개 썰매에 몸을 실은 연인들이 겨울을 만끽하고 있다.



평창=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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