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이후 서구 낭만주의 시대. 다수의 혁명가와 공화파들에게 악마는 마왕이 아니라 영웅이었다. 현세의 왕이 악이므로 "왕중왕" 그리스도 역시 악으로 여겨졌다. 기독교는 낡고 억압적인 질서(구체제)의 일부이며 사탄은 이에 항거한 반란영웅이었다. 이 시기의 예술가 블레이크는 억압의 권력에 맞선 사탄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그림 "순수의 징후"에 등장하는 서구식 날개달린 용은 이런 함의를 지닌 악마였다. "레드 드래곤"(브랫 레트너 감독)은 블레이크의 악마를 추종하는 현대의 악인에 관한 공포스릴러다. "양들의 침묵""한니발"시리즈에 이은 제3탄이지만 시기적으로는 "양들의 침묵" 전편에 해당된다. 안소니 홉킨스,애드워드 노튼,랄프 파인스 등은 인간의 악마성을 고도의 심리전으로 조탁해 냈다. 전작들에서 악의 화신이던 한니발 렉터박사역의 안소니 홉킨스가 FBI 베테랑 수사관 윌 그래엄(에드워드 노튼)과의 대결에서 잡힌 뒤 가족참살사건들이 잇따라 터지자 그래엄이 수감중인 렉터로부터 단서를 얻어 범인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그래엄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살인범과 만나야 하는 순간의 긴장감을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양들의 침묵"에서 조디 포스터가 연기한 클라리스 스탈링이 풋내기수사관이었지만 그래엄은 FBI의 영웅인만큼 활약상도 크다. 외모컴플렉스,보름달이 뜬 밤,깨진 거울,도려진 안구 등을 단서로 범인에게 접근하는 과정은 지적이면서도 긴박감이 넘친다. 블레이크의 악마그림과 렉터박사를 흠모하는 범인 프랜시스 돌하이드(랄프 파인즈)는 선과 악을 공유한 캐릭터다. 맹인여성을 사랑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면모는 선이다. 그러나 어린시절 할머니로부터 받은 학대는 내적 살인본능과 만나 화학결합을 한다. 그의 악마성은 억압에 대한 일종의 항거인 셈이다. 돌하이드의 내면에서 선악이 싸움하는 모습은 인간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돌하이드가 그래엄의 아들을 인질삼아 그래엄과 대치중인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래엄은 아들을 향해 애정의 표시 대신 욕설을 퍼붓는다. 범인에게 동병상련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돌하이드의 범행 표적에 대한 설명은 부실하다. 그는 일종의 확신범에 가깝다. 억압적인 가정에서 내면의 악이 형성됐다면 살해표적도 억압의 상징이어야 논리적 완결미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가 입수하기 쉬운 비디오테이프에서 범행대상을 고르는 것으로 설정됐다. 6일 개봉, 18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