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6일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등을 내세워1994년 체결된 제네바 핵합의 '파기'를 경고하고 나서 조지 W.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1.29) 이후 조성된 양국간 대치상태가 극한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미국의 적대적인 태도로 제네바합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며 "더 이상 일방적으로 합의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고 밝히고 미국의 영변 핵 사찰 요구를 전면 거부한 것으로 AFP통신은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의 제네바합의 파기 경고가 핵 원자로 재가동 등 핵동결 약속의 파기를 선언했다기 보다는 미국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토머스 슈워츠 사령관은 이날(미국시간 5일)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북한이 핵 사찰을 거부하면 내년에 위기상황이 올 수도 있다"며 북한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여 자칫 양국간 극한 대결 분위기가 조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북한의 대미 강경자세는 지난달 부시 대통령이 방한(19∼21일)중 북한 체제와 주민을 분리하는 접근 태도를 보인 뒤 서서히 가시화돼 지난달 말 금강산에서의 남북새해맞이 공동행사가 무산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지난달 26일 새해맞이 공동행사 북측본부 성명에서 "미국의 책동 때문에 행사가 무산됐다"고 밝혔으며 지난 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도 이와 관련한 담화를 통해 미국을 거세게 비난했다. 다음날인 4일 평양방송은 `부시는 악의 왕초, 미국은 악의 제국'이라는 제목의 보도물을 통해 부시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한 대화를 하지 않을 듯한 태도를 보이기에 이른다. 이날 보도물은 보기에 따라서는 과거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김영삼 정부가 김주석 등을 가리켜 `전쟁의 원흉' 등으로 지칭한 이후 북한이 남한 당국과의 공식 접촉을 단절했던 때를 연상시킬 만큼 강경한 것이었다. 방송은 "미국의 역사는 악의 역사이며 미국의 대외정책은 악으로 일관돼 있다"고 미국을 비난한 뒤 "미국의 안전은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도 부시는 제거돼야 한다"고 부시행정부를 몰아세웠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다양한 표현과 형식으로 미국의 대외정책과 부시대통령을 비난해 왔지만 '부시 대통령의 제거'를 언급한 적은 없었다. 지난달 27일 '우리는 미제와 결판을 내고야 말 것이다'라는 제목의 노동신문 논평도 "부시네들은 우리와 상종할 대상이 안된다"면서도 "과대망상증에서 깨어나 반공화국 광증을 걷어치워야 한다"고 촉구해 대화의 여지는 남겼었다. 그러나 북한의 제네바합의 파국 경고가 곧바로 북미 대결국면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이 무력 응징이나 경제봉쇄가 아닌 대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워츠 사령관도 상원 군사위 발언에서 "북한이 핵개발 중지 및 미사일 시험 발사 중지 등 `약속'을 지키고 있으며 테러와 연관돼 있지 않다"고 밝혀 북한에 대한일방적인 행동에 나설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1999년 8월에도 북한의 소위 '광명성 2호'(일명 대포동 2호) 시험발사 준비를 둘러싸고 북미 양국간 제네바합의 파국 분위기가 조성됐으나 실제로 '파국'은 없었다. 북측의 초강경입장에 대해 미국은 '페리보고서'를 발표해(1999.9) 북한과의 고위급회담에 나섰고 대북 경제제재를 일부 해제했으며(1999.9) 이에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 중지 약속으로 화답했었다. 또 아직 확인되지는 않고 있으나 북한이 최근까지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주한미군 철수 요구에 미국이 단계적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결국 북한의 '제네바합의 파국' 경고는 양국간 소강상태를 깨뜨리고 전격적인 대화 국면을 열기 위한 승부수일 가능성이 높다. (서울=연합뉴스) 강진욱기자 kjw@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