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겐 뢰플러 < 하나알리안츠 투신운용 사장 > 많은 한국기업들이 '기획 부서'를 두고 있다. 이 기획부서는 기업 내에서 그 어느 부서보다 막강하다. 한국 기업들은 크고 작은 경제문제들이 발생하면 정부가 대처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예컨대 언론이 '중국이 WTO에 가입하여 한국의 일부 산업이 위험하다'고 보도하면,경제정책담당자들은 신속히 해당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5개년 또는 10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정부가 산업정책에 적극 관여하는 것은 한국경제의 발전이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 관리'된 과거의 유산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분명 대단히 성공적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성공이 막대한 비용을 치렀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중소기업은 물론 '대마불사'라는 대기업마저 잇달아 쓰러졌다. 부실 금융권을 정상화하기 위해 1백50조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고,제조업체의 약 30%는 이자보상비율 1 이하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좋지 않은 과거의 유산은 '유연성 없는 노동시장'과 '격렬한 노동조합'일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부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같은 과거의 산업정책이 없었다면,한국의 반도체 조선업 철강산업이 오늘날 세계의 선두에 나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덴마크 캐나다 뉴질랜드는 자본집약적 산업을 갖지 않고도 부유한 나라가 됐다. 미래의 유망업종은 소프트웨어,미디어 또는 서비스 같은 '물질적 자본'이 아닌,'지식 기반'산업에 있다. 첨단 정보통신 및 지식사회에서의 '정부주도' 산업정책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어느 한 정부부처나 기관이 실수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면,나라의 미래까지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중국이 좋은 사례다. 15세기 초 중국은 해운 및 조선의 기술면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륙을 발견한 것은 유럽이었고,5백년간 현대과학을 발전시키고 세계 역사를 지배한 것도 서양문화였다. 중국이 뒤처지게 된 요인은 '1인 통치체제'에 있다. 중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소의 문을 닫아 기술적 강점을 상실했다. 중국은 그후 상당기간 광활한 영토내 어느 곳에서도 조선업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와 달리 유럽은 여러 왕국,봉건국가와 자치도시로 분열돼 각각의 체제를 구축하고 다양한 산업·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미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자유로운 경쟁 하에서 위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들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정책자들의 '기획'에 의해서가 아닌,'시장 원리'에 의해 미래가 정해져야 한다. 이 말대로 산업정책에 관여하지 말고,또 부실기업도 지원하지 말며,새로운 산업을 일구지도 말아야 한다면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정상적인 경기 사이클이 만성적인 불경기로,나아가 불황에 빠져들지 않도록 거시경제 정책에 관여해야 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이와 관련,지난해 한국정부의 역할은 긍정적이다. 정부는 또 소액주주의 권한을 포함한 재산권을 보호하고,투명한 회사 경영과 유연성 있는 노동 시장을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생존할 수 없는 회사들이 더 이상 돈을 낭비하지 못하게 '효율적인 정리절차'를 마련해 자본과 노동이 보다 성장성 있는 영역으로 빨리 전환되게 해야 한다. 기업가들이 새로운 사업에 적극 도전하게 하고,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비즈니스를 갖도록 유도하는 틀을 제공하는 동시에 경쟁적인 경제환경 속에서 본인의 잘못 없이 기본적인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해야 하는 것도 정부역할이다. 정부는 또 지식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정신과 정직성을 겸비한 창조적이고 비판적이며 자신감 있는 젊은 세대를 양성하는 '현대적인 교육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같은 과제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나라는 번성할 것이다. 재정적인 문제가 있겠지만,시대에 뒤진 의식구조와 관습에서 탈피,희망 있는 새로운 길로 가는 비용으로 인식해야 할 일이다.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