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등록기업인 S사의 기업홍보(IR) 팀장인 K씨(42)는 최근 기막힌 경험을 했다. 자신을 모 투자그룹소속이라고 밝힌 한 투자자가 "우리 팀이 작전(주가조작)에 들어갔으니 함께 참가할 의사가 없느냐"는 뜻을 전해온 것. K팀장은 너무나도 당당한(?) 작전 제안이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증시의 한탕주의식 투자 마인드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증권거래소와 증권업협회의 시장감시실에서는 주가조작 혐의가 있는 종목이 하루에도 수십건이 잡힌다. 이중 작전 혐의가 짙어 금융감독원에 전달되는 것만 한달에 40여건에 달한다. 주식시장을 투기판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일부 대주주는 건실한 기업 경영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증시를 통한 재테크를 본업으로 삼을 정도로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극심하다. 시장참가자들도 오로지 머니게임에만 몰두한 나머지 작전과 허수주문을 일삼고 있다. 증권사도 약정고라는 '마약'에 중독돼 투자자의 수익률 제고라는 본업에선 한발짝 물러서 있다. 기업과 투자자, 증권사 등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 증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는 정보기술(IT) 경기 침체 등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요즘엔 테러와 전쟁이란 변수가 한겹 더 얹혀져 있다. 그러나 시장을 황폐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인위적으로 주가를 띄워 보겠다는 대주주와 투자자들의 '탐욕'이다. 다른 말로는 '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용호 게이트'가 단적인 사례다. 지난해엔 '정현준 게이트'가 격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분율이 3~5%에 불과한 대주주가 기업을 마음내키는 대로 주무르는 행태나 투명하지 못한 회계감사보고서 등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한 요인이다. 영국 슈로더투신의 잔 킹제트 이사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한국의 회계투명성이 많이 좋아졌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회계와 지배구조 개선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기업이 시장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점"이라고 덧붙였다. 작전으로 대표되는 증시의 혼탁한 공간 속에는 개인투자자의 얼굴도 보인다. "개인중 상당수는 자신이 투자하고 있는 기업이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지 조차 모른다"는게 증권사 영업담당자들의 전언이다. 작전종목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작전종목을 찾아달라고 하는게 한국 투자문화의 현주소다. 또 주가 하락할 때 정부에 노골적으로 부양책을 요구하고, 매도 추천을 하는 애널리스트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반시장적인 행태도 서슴지 않고 있다. 우량기업에 장기투자해 적정 수익을 내겠다는 생각보다 어떻게든 단기 매매차익만 올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판을 치고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선 주주로서의 주인의식이 생기기 어렵다. 한건주의의 단타매매도 건전한 투자 문화를 비틀고 있다. 국내증시의 주식매매 회전율(지난해 상장기업 2백34%)은 미국의 3배, 일본의 5배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 규모는 커지는데 반해 주가는 뒷걸음질을 친 영향도 있다. 1992년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3백3조원. 지난해 GDP는 4백76억원으로 57%나 늘어났다. 그러나 주가는 1992년말 종가(678.44)에 비해 오히려 낮다. 그렇다고 단기 투자자인 개인들이 재미를 본 것도 아니다. 이남우 삼성증권 상무는 "국내 기업들이 외형 키우기에 치중하면서 ROIC(총투하자본수익률)가 자본비용에도 못미치는게 장기투자를 어렵게 만드는 첫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젠 달라져야 한다. 모두가 손해 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실질금리 '제로시대'에 들어서면서 3백조원에 달하는 부동자금의 증시 유입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상장기업의 자기자본익률(ROE.10.5%)이 처음으로 시장금리를 웃돌았다. 장기투자 환경은 상당부문 조성된 셈이다. 결국 건전한 투자 문화가 조성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투자자와 기업 모두의 어깨에 달려 있다. 분식 결산 등으로 재무제표상 멀쩡해 보이던 기업이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사라지고 대주주가 회사 돈을 개인 돈 쓰듯 하는 관행이 사라지면 장기투자라는 새로운 투자 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저금리 저물가 저성장 시대를 맞아 그런 희망의 싹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교보증권의 한 관계자는 "지금처럼 도박장 개념의 증시에서 탈피, 산업자본을 조달하는 본래 의미의 증시로 돌아가야 한다"며 "정부.감독기관.등록기업.투자자 등 각 분야에 대한 총체적 개선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모두가 이기는 게임을 하려면 주식투자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 남궁덕 기자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