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공중폭격을 시작한 8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숨돌릴 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0시31분 미국의 사전 연락을 받은 후 그는 정부,여당 고위 관계자들을 긴급 소집한데 이어 한 밤중인 오전 2시54분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는 오전 8시 중국 방문 길에 올랐다가 약 12시간만인 오후 8시48분 일본에 돌아왔다. 밤 10시 넘어서까지 임시각료회의를 주재한 그는 12시가 다 돼서야 관저로 돌아갔다. 일본 정부가 테러 제재를 강력 지지한다고 공언한 이상 그의 행동은 마땅한 것이었다. 국민들에게 신뢰와 안심을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8일은 고이즈미 총리의 중국 방문이 예정된 날이었다. 역사교과서 왜곡과 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시점에서 정상회담이 열리기로 돼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출발을 한 시간 늦추고 예정보다 3시간 빨리 돌아왔다. 중국에 머문 것은 단 6시간이었다. 출발이 늦어진 것은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과의 전화 때문이었다. 중국 방문이 연기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를 비행기에 오르게 한 것은 부시 대통령의 "잘 다녀 오십시오"라는 한마디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공개적으로 미국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다. 지난 5월 부시 대통령과 첫 대면했을 때는 '나는 친미파'라는 일성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미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그의 언행 역시 흠잡을데 없다. 그러나 문제는 방법이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전통적 선린 우호국인 한국 중국을 제쳐 놓는 자세를 보여 왔다. 양국에서 반일감정이 들끓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 언론은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국제 사회의 결속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중국이 갖는 비중을 주목하고 있다. 한쪽에만 눈을 돌린 나머지 중국 방문을 '반의 반나절' 일정으로 끝낸 것이 균형잡힌 외교냐는 시각이다. 테러 전쟁의 대의명분 속에 감춰진 고이즈미 총리의 편향적 사고와 원맨 쇼.이는 자위대 해외파견과 함께 아시아 우방국을 떨떠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잠재적 걱정거리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