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달리던 두대의 열차가 끝내 부딪치고 말았다.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해임안이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조에 의해 가결되는 순간 떠오른 생각이다. 요즘이야 마주 달리는 열차를 보는 것이 그리 생소한 일도 아니지만 그 당사자가 공동여당의 양축을 구성했던 민주당과 자민련이라는 점 때문에 앞으로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한다. 당장은 수적으로 밀리는 민주당 쪽이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인다. 내각은 물론이고 민주당 청와대비서실까지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전열을 정비하는 패잔병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민련 쪽의 상처도 만만치 않다. 내각에 진출한 소속의원들이 당으로 복귀해야 하고,민주당에서 임대해온 의원들이 탈당함에 따라 천신만고 끝에 얻은 교섭단체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사실 이한동 국무총리의 잔류설이 나왔던 것만으로도 자민련은 감추고 싶었던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낸 셈이다. 이 정권 들어 수도 없이 장관 해임안 표결을 감행했던 한나라당은 뜻밖의 원군을 만나 드디어 일을 성사시켰다고 기뻐만 하기에는 뭔가 얼떨떨한 느낌일 것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고,한나라당이 추진해온 일을 자민련이 앞장서 해결하니 선수를 뺏긴 것 같기도 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이 확신을 갖고 맞은 편에서 오는 열차와 충돌한 속내가 무엇인지 몰라 불안감을 떨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을 궁금해하는 쪽은 한나라당만이 아닌 것 같다. 사람마다 해석이 가장 엇갈리는 부분이 바로 정치9단 김 대통령의 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김 대통령이 여당공조보다 대북정책이 더 중요하다는 대국민 선언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더 이상 여당공조를 통해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 머문 지 4년 되었다는 한 외국 특파원은 '김 대통령이 그 특유의 오기 때문에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며 '도대체 이 일로 얻을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임 장관 한명을 사퇴시킨다고 대북정책이 좌초하는 것도 아닐텐데 공동여당을 깨면서까지 레임덕을 자초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특파원에게 한가지 분명하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대북정책을 둘러싼 정당 간의 이념 갈등이 표면화된 데에 있다기보다는 정당 지도자들의 기(氣)싸움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처럼 김 대통령의 순간적인 오기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김 대통령의 선택이 그 특파원의 예측대로 자충수가 될지,아니면 세기의 승부수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는 DJ가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정치인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DJ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며 정략가다. 대통령이 정파의 이익에 앞서 국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인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겠지만,개인적 감정이 앞서 한치 앞도 못 내다보고 계산착오를 범하는 정치인은 결코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띄운 정면 승부수가 민주당에 최종의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민주당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 진정으로 국민을 감동시키는 정치가 펼쳐진다면 여론정치가 나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 답방을 비롯한 일회성 행사로 국민을 감동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과거에도 보았듯이 그런 열기는 며칠 가지 않아 금세 시들해지고 만다. 언론이 여론을 호도한다며 무시하기에는 민심은 너무도 냉정하다. 곧 단행될 인사에서부터 대통령이 한판 승부를 건 이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또 다른 분노로 바뀔 가능성이 더 많다는 그 특파원의 주장에 나는 반쯤 동의하고 말았다. 이제는 '호남=소수정권'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큰 정치를 펼치는 모험을 해볼 때도 되지 않았나. choks@mm.ewha.ac.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