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직후 456일 간에 이르는 계엄기간에 평균 9.8%에 이르는 기사가 검열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이민규(李珉奎) 교수는 79년 10월 27일∼81년 1월 24일신문ㆍ방송ㆍ통신ㆍ잡지 등 기사 27만8천361건에 대한 계엄사령부 보도검열단의 검열기록을 분석한 논문 `언론통제에 관한 실상과 항거-1980년대 계엄하 언론통제 소고'를 다음달 초 순천향대가 발간하는 「사회과학연구 제7호」에 발표할 예정이다. 매체별 검열 건수는 통신 11만7천79건, 신문 7만344건, 방송 6만129건, 잡지 2만1천825건, 문화홍보 8천984건의 순이었으며 평균 9.8%에 이르는 전체기사 대비 전면-부분삭제 비율은 신문(16.3%), 방송(11.7%), 통신(5.9%), 잡지(5.8%), 문화홍보(4.4%) 등의 차례로 높았다. 이교수는 당시 언론이 신군부의 사전검열 정책에 맞서 항거한 유형을 ▲독자로하여금 현실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포괄적 사실보도형' ▲검열의부당함에 대해 언론자유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삭제된 면을 다른 기사로 채우지 않는'정면 돌파형'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기사내용에 함축시켜 독자들이 기사의 행간을 통해 전반적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는 `은유와 우회형' 등 3가지로 분류했다. 이교수는 계엄사의 검열로 햇빛을 보지 못한 첫번째 유형의 기사로 △상세한 부마사태 상황 보도(79년 12월 9일자 조선일보 게재 예정) △ 해금된 김대중(金大中)씨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 인터뷰(79년 12월 10일ㆍ동아) △언론 통-폐합설에 대한 오자복 국보위 문공위원장 발언(80년 9월 18일ㆍ한국) 등을 들었다. 두번째 `정면돌파형' 사례로는 사북사태 취재를 하던 자사 기자가 합동수사반에의해 집단구타당하자 중앙일보가 80년 5월 7일 1판에 삭제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둔채 발행한 이른바 `중앙일보 백지신문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2판에서는 폭행기사만을 1단으로 보도했으며, 3판부터는 폭행기사를 빼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유감 표명 및 수사관 구속 등을 담은 사과기사를 대신 게재했다. 80년 5월 9일에는 기자협회 CBS 분회가 언론자유 쟁취를 위한 5개항 결의문을발표한 데 이어 12일 한국일보 분회도 언론자유 확보와 계엄 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신문에 게재했다. 이교수는 세번째 `은유와 우회형' 기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79년 11월 22일 동아일보가 대하소설 「토지」의 완간을 기념해 게재한 박경리(朴景利)씨 인터뷰를 꼽았다. 이 기사는 "글 쓴다는 것은 고통과 마주서는 일", "불우할 때 좌절하지 않고 넉넉할 때 오만하지 말자"는 등의 제목으로 시대의 아픔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가 하면 신군부의 기피인물이었던 박씨의 사위 김지하(金芝河)씨의 얼굴 목각상을 담은사진을 실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