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영국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으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어떤 전자회사의 영국 현지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는데,영국정부 관리가 그 전자회사의 고위간부에게 반도체의 성공비결을 묻자, "관리가 반도체를 모를 때 시작해서"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규제가 없을 때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 성공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 얘기를 생각하면 나도 오랫동안 공직생활에서 잘한다고 열심히 일했는데,정작 기업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최근 전경련은 신규투자를 억제하고 경쟁력 강화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30대 계열기업에 대해 순자산의 25%로 제한하고 있는 총액출자한도를 풀어 달라고 건의했다.

두산그룹과 같이,한국중공업을 인수함으로써 핵심역량 사업이 음료에서 중공업으로 옮겨가는데 투자가 제한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당국자는 불가하다고 하다가,구조조정을 위한 경우나 핵심역량사업에 투자하는 경우에 대해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최근 스위스의 국가경영개발원(IMD)이나 미국의 경영잡지 ''포브스''는 한국의 정부규제가 지나쳐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시아국가들 중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중국보다 더 ''기업하기 힘든 나라''라고 했다.

IMD는 한국의 정부규제는 조사대상 49개국 중 44위로서 최하위권이고, ''포브스''는 한국의 기업환경은 조사대상 아시아 8개국 중 인도만 제치고 7위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오래 전부터 규제를 푼다고 노력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아마 정부 입장에서 규제의 필요성을 판단하거나,자유로운 시장경쟁보다는 관리된 공정경쟁을 기준으로 규제를 풀어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재벌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다른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이러한 규제는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해치고 기업의 해외이전을 촉진하는 부작용도 있다.

내년 3월까지 해소해야 할 출자한도 초과금액이 10조원 정도가 된다니 현재의 증권시장 여건으로 보아 매각도 쉽지 않고,비상장 주식은 그나마 시장도 없으니 더 어렵다고 한다.

수출부진이 계속되는 속에 투자할 여력이 있는 기업은 총액출자한도에 묶여 투자를 못하게 된다면 경기침체가 장기화할 우려도 있다.

5월 들어서도 지난 4월에 이어 수출은 감소하고 있다.

수입도 지난 4월에 원자재는 12.1%,자본재는 25.6%나 줄어 전체적으로 16.1%나 줄어들었다는 것은 심각하게 봐야 한다.

원자재 수입이 줄어들면 단기간에 경기가 회복될 수 없고,자본재 수입이 줄어들면 중장기적으로도 경기전망은 어둡다.

재벌의 구조조정이 아직도 부진하지만 규제에 의한 효율과 비효율을 비교해 새로운 정책의 선택이 불가피한 시점이 됐다.

최근 가계나 기업의 심리지수가 약간 호전되는 것을 보고 경기의 회복을 조심스럽게 예견하는 사람도 있으나 원자재나 자본재의 수입없이는 원천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없고,투자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정책은 선택의 문제이고 언제나 역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많을 때 정부는 정책전환에 실기해서는 안된다.

재벌의 폐해에 의한 비용보다 규제에 의한 비용이 더 큰 경우도 규제를 계속한다면,국제수지는 악화되고 실업자는 늘어나고 모두가 손해보는 게임을 하는 것이 된다.

경쟁국에 없는 규제는 우리 기업의 발목을 스스로 묶어 버리는 꼴이 된다.

재벌의 폐해는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해결될 수도 없고,기업인 스스로가 자기기업을 더 걱정한다.

지금은 정부와 기업이 합력해도 어려운데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얼마 전 TV에서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교민에게 이민 온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관리들의 규제가 지겨워 왔다고 말하며,공무원이 앞장서서 안되는 것도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는 캐나다에 이민 오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이제 기업이나 개인이나 스스로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지구촌시대다.

이민 가는 젊은 인재들과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기업들을 몰라라 할 때가 아니다.

''관리가 반도체를 모를 때 시작해서'' 성공했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