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일로 만나는 많은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에서는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는 말을 듣는다.

속상한 일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 스스로도 이런 자조적 얘기가 전혀 새롭지 않다.

정해진 규칙과 절차에 의하기보다는 담당자와의 인맥 학맥 등 관계나, 소위 ''언더 테이블 머니''가 안되는 일을 되게 하고 되는 일도 안되게 할 수 있는게 한국 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후진국의 공통된 현상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 1997년의 외환위기와 이로 인한 IMF 관리체제 이후 한국 경제는 역사이래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에 나서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수많은 기업들이 일상적으로 분식회계를 해왔으며 분식회계를 감시해야 할 회계사들이 당연한 것처럼 이러한 불법행위의 한 축을 이뤄 왔다는 현실이었다.

분식회계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진행된 대형 공사치고 시공업체와 한통속에서 이뤄진 부실 감리가 문제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회계감사와 공사감리가 제대로 안된 이유는 간단하다.

원칙을 지켜 제대로 하면 까다롭다고 욕을 먹고 다음 번에는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쌓여 결국 한국 사회는 원칙과 절차를 지킬수록 손해를 보는 사회적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그 폐해는 ''불신(不信)의 사슬구조''라는 문제로 고착됐다.

이른바 ''진승현 게이트''니 ''강남 카지노''니 하는 일련의 사건들에는 예외없이 정.관계 실력자들의 연루설이 돌았고 이는 고급정보와 권력을 쥐고 있는 일부 계층의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고도화된 수탈''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기업들의 구조조정과정에서 가장 저항이 크고 많은 불만이 제기되고 있는 해고문제도 이같은 원칙부재로 인한 불신의 사슬구조에 함몰돼 있다.

고용 문제는 한국처럼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결여되어 직업이전 가능성이 낮은 사회에서는 개인과 가족의 생계와 직결된 중대 사안이다.

따라서 특히 객관적인 판단과 공정한 기준, 규칙이 요구되는 문제다.

그런데도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피고용자 개인과 그 가족의 생계를 고려하지 않은 머릿수 채우기식 해고의 양상을 보임으로써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현재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 영국 독일 등도 모두 구조조정을 겪어온 나라들이다.

미국의 80년대는 다운사이징의 시대라고 이름 붙여질 정도로 구조조정과 해고의 거센 바람이 기업들을 휩쓸고 지나가던 시기였다.

당시 핑크슬립이라 불린 해고통지서 한 장으로 바로 보따리를 싸야 하는 시대상황에서 출근을 두려워하는 직장인들을 희화화한 만화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가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마치고 선진국의 지위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공평성 인식에 부합되는 원칙에 입각한 대안을 창조, 이를 시행한데 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소득공유(income sharing)라는 방법으로 구조조정의 문제를 해소했다.

이는 해고대상자들에 대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봉급을 일정부분 떼내 해고기간중 제공하고 기업사정이 좋아져 다시 신규 인력수요가 생길 때 이들 해고자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원칙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지만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고용구조를 가진 독일이 무리없이 구조조정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창조적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원칙은 신뢰와 질서를 낳는다.

원칙없는 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추진할 때 그 성공 가능성이 일 자체의 본질보다는 일 외적인 사람과 돈에 의해 좌우되는 불확실성이 만연한다.

거래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는 결과를 예측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회이자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대가 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리스크에 상응하는 높은 대가를 요구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사회 전반의 고비용 구조를 만들고 결과적으로 경쟁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rskwak@cakra.dongguk.ac.kr

◇ 필자 약력 =△서울대 조경학과 △미국 텍사스대 경제학 박사 △제22회 행시 합격 △현 한국협상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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