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이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동방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의 지식인이 세계를 경영하는 미국을 연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기껏해야 서방학문의 앵무새가 되는 학문적 사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잘해야 세계질서를 그들의 입장에 따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렇게 끊임없이 회의하던 중 접하게 된 이삼성 교수(가톨릭대)의 ''세계와 미국''(한길사,3만원)은 터널 끝의 작은 불빛과 같이 다가왔다.

저자는 20세기 세계질서,미국의 지배적 역할의 본질과 내용에 대한 종합적이고 비판적인 이해를 통해 21세기 세계평화 문제에 이론적·실용적 준거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패권,세계질서의 변동,세계인식,인권,군사력과 미사일 방어,핵,코소보전쟁,유엔,생태·환경위기,패권의 지정학 등 20개항을 통해 20세기를 반성하고 21세기를 조망한다.

우선 필자는 국내적으로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미국이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이에 반하는 정책을 왜 많이 내놓는지 질문을 던지고 국내적 이유와 국가 이익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첫째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 국경에서 끝난다.

그것은 다른 사회나 다른 민족의 평화와 생존권을 우선시하는 가치관과는 무관하다.

이는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미국 자신은 민주적 다원주의이지만 미국의 대외적 행태는 반민주적이고 패권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

둘째 국내적인 이유로 미국의 다원주의적 정치경제질서 역시 일정한 민주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힘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은 대외적인 행동의 우선 순위에서 경제적 또는 전략적으로 편협한 이익을 앞세울 수 있다.

미국이 편협하게 정의한 국가이익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질서는 본질적으로 미국의 기득권이 유지·확대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저자는 이 점을 미국이 펼친 다양한 외교·군사·인권·환경정책 등의 문제를 통해 꼼꼼하고도 구체적으로 살핀다.

그것도 미국의 관점에만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서 논증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독자들로 하여금 단순한 적(반미)이나 동지(친미)로서의 미국이 아닌 용미(用美)를 위해 미국의 작동원리와 속성,세계정책을 객관적으로 판독하도록 만들고 있다.

미국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형(地形) 읽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 안보와 번영을 통해 21세기를 인류 공동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한 최선의 전지구적 노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비전과 철학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은 미국의 정치적 지식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저자의 다음 저작에서 이러한 우리 자신의 몫이 정확한 지형 읽기를 뛰어넘어 어떻게 구체화돼 나타날지 기대해 본다.

유석진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