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IMF 위기를 겪은 후,국민들의 교양과 상식은 부쩍 높아졌다.

누구나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라는 개념에 익숙해졌고,''도덕적 해이''나 BIS비율도 친숙한 일상용어가 됐다.

제2경제위기가 체감되고 있는 요즈음 ''시장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더 현저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부는 그동안 ''정부의 실패''보다는 ''정부의 성공''을 자부하고 홍보해 왔지만,수사와 현실과의 괴리가 현격해졌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정부가 자신의 실패를 진솔하게 인정한 적은 별로 없다.

갖은 명분과 구차한 논리를 대면서 ''정책실패''를 호도하고 ''시련은 있되,실패는 없다''는 준칙을 금과옥조로 삼을 뿐이다.

그나마 ''정부의 실패''가 있다면,현 정부가 전 정부의 실패를 파헤치는 과정이나,전 정부의 무능과 현 정부의 유능함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정부의 실패''는 전 정부와 현 정부를 막론하고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다.

정부의 존재이유와 역할이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데 있지만,경찰이 있어도 ''나''의 집은 털릴 수 있고 폭력배의 희생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범죄자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내''가 자중자애해야 하는 것이지,경찰을 믿고 밤늦게 으슥한 골목길을 걷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뺑소니차 피해를 당한 사람도 스스로 목격자를 찾는 전단을 작성·살포해야지 경찰이 찾아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왕따 초등학생이 경호원의 경호를 받으며 등교하는 것도 ''정부의 실패''다.

초등학생의 부모가 세금말고 경호원의 월급까지 부담하면서 자녀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범주의 ''정부의 실패''에 비교적 너그럽다.

숫자는 턱없이 적고,박봉에 허덕이는 경찰이 ''6백만불의 사나이''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한다면, 이는 분명 과잉기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정부의 실패''가 있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일부러 하지 않거나,소홀히 하는 경우가 그렇다.

정부가 말로는 공정한 인사를 공언하면서 실제로는 지역편중인사를 할 때,''정부의 실패''는 관심의 초점이 된다.

작년보다 어려운 수능이라고 발표한 후 실제로 다수의 만점자를 양산한 금년의 수능시험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만,난이도 조정에 실패한 저간의 사정을 이해한다.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시험출제자들의 능력이 부족해 턱없이 쉬운 수능을 만든 것을 어찌하겠는가.

또 정부가 공무원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든지,획기적인 교육투자,과감한 복지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아도 정부의 도덕성 문제로까지 비화되지는 않는다.

재정 부족이 그 원인임은 공지의 사실인 까닭이다.

그러나 가신그룹이 국정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신그룹의 노골적 국정개입이 여론의 도마위에 올랐던 사실은 용서받기 어려운 ''정부실패''의 전형이다.

또 중립적인 검찰을 수차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검찰을 보는 것도 식상하는 일이다.

이들 사례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정부의 실패''에 해당되는 것은 정부가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이 허탈해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정부실패''가 아니라 용서받을 수 없는 ''정부실패'' 때문이다.

정부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정권담당자들의 이기주의 탓이다.

시장 행위자에게서 이기주의는 크게 비난할 바 못된다.

물론 시장 행위자의 이기주의 때문에 환경오염 등 공공재 문제는 야기되나,일반적으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기주의에 의해 작동한다.

그러나 정부행위자들의 이기주의는 ''미덕''이 아니라 ''악덕''일 뿐이다.

정부는 공익성과 도덕성,정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해야 하는 까닭이다.

오늘날 우리의 난국은 용서받을 수 없는 ''정부의 실패''에서 비롯됐으며,이는 결국 위정자들의 편협한 안목과 이기주의가 빚어낸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