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애 < 건축가 / (주)서울포럼 대표 >

"설계가 제일 중요하지요""설계가 좋아야 결과가 좋지요"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다.

전문인으로서 책임과 의욕을 느끼는 때다.

그러나 그런 책임감이나 의욕도 실무현장에서는 여지없이 꺾인다.

설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그저 입발림 공치사에 불과한 것이 우리 사회의 비애다.

''공사를 딴다''''사업승인을 득한다''에 힘이 실리는''개발시대''풍토에서 삶의 질,환경의 질,기술혁신을 고민하는 설계는 돈벌이 때문에 등한시됐었다.

그러더니 작금의 ''건설빙하기''에서는 일감이 없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개발시공자가 주가 되는 아파트는 덤핑 설계가 판치고 있고,판박이 같은 아파트를 아무 데나 찍어내도 별다른 도리가 없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은 동네 집장사들이 허가방에서 풀빵같이 똑같이 찍어내도 도리가 없다.

설계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는 언론에서도 부추길 정도다.

신문 부동산면에서는 건물을 지으려면 설계사무소로부터 ''가설계''를 받으라고 권장한다.

물론 ''공짜''를 전제한다.

이런 권고 때문인지 많은 건축주들이 설계사무소를 돌아다니면서 별 효과도 없는 공짜 설계안을 받으려 든다.

공공기관에서도 설계를 공짜로 생각하기는 마찬가지다.

공공사업은 ''설계경기''를 하지만 1등에게 설계권을 주는 외에 2∼3등에게는 당선사례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준비하려면 도면 투시도 제작비만으로도 수백,수천만원이 들게끔 요구하면서도 말이다.

재정이 부실한 지자체의 경우 사업비도 없이 시작해서 당선자가 설계를 못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감리는 또 어떤가.

''삼풍 붕괴사건''이후 가장 빨리 도입된 감리제도,설계대로 시공하는지 감시하자는 제도다.

제대로 견제 역할을 하나? 문제 생기면 공무원이 책임 질 데를 만드는 의도 외에 무슨 역할을 하나.

그래서인지 감리비는 설계비보다도 후한 편이다.

그런데 ''적격입찰''을 통해 감리자를 선정하니 설계자가 감리를 못하는 경우가 많고,설계자가 빠진 공사에서 임의로 설계를 바꾸고 감리는 뒷수발이나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파트 같은 민간공사인 경우에는 더 심각하다.

덤핑 감리는 물론 아예 ''도장 찍는 값''만 주고 시공자가 알아서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무리 법조문이 있어도 여전히 부실시공이 그치지 않는 이유다.

시공과 설계를 일괄하는 ''턴키 제도''가 생긴 이후에 설계는 더욱 들러리가 되고 있다.

턴키 사업 공모에서 설계안 자체보다는 공사금액과 실적에 의해 당락이 좌우된다.

건설회사들이 수주에 목을 걸고 심사 부정이니 로비니 하는 문제가 그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풍토에서 설계분야는 최근 큰 홍역을 치러야 했다.

설계와 감리를 책임지는 ''건축사''의 근거법인 건설교통부의''건축사법''을 없애고 노동부와 교육부가 관리하는 약 1백여개의 국가자격에 통합한다는 입법예고였다.

설계분야는 신규 사업개척과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종의 ''촉매분야''다.

이를 진작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설계기술력을 선점한 선진국가가 주도하는 ''세계건축가연맹(UIA)''은 전문성에 근거한 통합체제를 만들고 세계시장 진출을 위해 혈안이 된 마당이다.

우리나라의 자격이 세계시장서 어떻게 인정되게 하느냐가 관건인 마당에 정부는 오히려 전문성을 부정하는 식으로 설계분야를 가볍게 생각하니,해외시장은 커녕 우리시장을 다 내놓으란 말인가.

우여곡절끝에 수정됐지만 도대체 정부는 세계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지 딱하다.

부정부패,부실이 그치지 않고 국토훼손과 도시환경파괴로 비판받는 건설분야가 환골탈태하려면 설계분야가 제대로 서야 한다.

설령 최상의 양심은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공공 양심''을 지킬 수 있는 분야가 설계분야다.

최소한의 독립성을 갖춰야 양심도 제대로 선다.

부정부패 자금이 뉴스를 장식할 때마다 쓰라리다.

그 돈이 제대로 쓰인다면,제대로 설계에 투입되고 감리에 쓰인다면 아무리 지금 힘들어도 미래를 기약할 수 있으련만.''설계는 제일 중요하다''가 정말 실현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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