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여행] (下) '두브로브니크' .. '유럽의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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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자연은 두 얼굴을 가졌다"
크로아티아 현지 여행사 아틀라스사의 안내원 블랑코씨는 장난끼 어린 얼굴로 알듯 모를듯한 소리를 했다.
자그레브~플리트비츠호수 국립공원에서 본 내륙지역과 아드리아해와 맞닿은 연안지역의 지형 및 지세가 딴판이란 것이다.
좁은 나라인데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플리트비츠호수 국립공원에서 자다르로 향하면서 블랑코씨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심한 꽈배기길을 거슬러 높지 않게 이어진 산마루를 넘자마자 희한한 세상이 펼쳐졌다.
시선이 닿는 곳은 희뿌연색의 일색이었다.
잿빛 돌사막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키 작은 관목을 인 덩어리 큰 바위무리가 때론 평탄하게 때론 깊은 계곡을 이루며 멀리 내달았다.
바다속 깊은 계곡이 솟아오른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륙쪽이 파스텔풍의 화사한 수채화라면 이쪽은 농담조차 맞지 않은 수묵화에 비견됐다.
노출이 정확한 컬러사진과 초점도 맞지 않은 흑백사진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황량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티토 치하에 국가사업으로 세웠다가 타산이 맞지 않아 폐허로 방치된 알루미늄정련공장의 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그런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자연은 자다르에서 또한번 조화를 부렸다.
자다르는 유럽도시의 화장기 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유의 옅은 주황색 기와를 얹은 주택, 짙푸른 바다위의 요트와 대형 페리, 오랜만에 구름걷힌 하늘과 태양빛.
상상속의 아드리아해 연안도시 모습이 거기 있었다.
"베네치아에의 선물"이란 뜻의 자다르는 북 달마시아지방의 중심지.
연륜이 느껴졌다.
로마시대 때 쌓은 성곽 안쪽은 베네치아공화국 점령시절의 흔적과 겹쳐 있다.
중심은 로마광장.
"로마광장은 1백년전까지만 해도 땅속에 있었다"고 이곳 안내원 야스민카씨는 말했다.
크로아티아 최초(1396년)로 대학이 세워졌으며 크로아티아어로 된 신문의 발생지로서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수녀원 박물관에 전시된 성물(聖物)들이 특이했다.
사람의 팔과 머리 형상의 금.은 조각품들이 많았는데 그 속에 해당인물(이곳의 성인)의 해당부위 뼈조각을 모시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불가의 사리함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길게 늘어선 바위산 허리에 위태롭게 놓인 길을 따라 스플리트로 향했다.
도중에 크르카국립공원에 들렸다.
7개 국립공원(크로아티아는 국토의 7.5%를 국립공원 및 자연보호구역으로 보호하고 있다)중 하나다.
여러개의 낮은 폭포가 잇닿아 물길이 시원했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
3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로마시대 건축양식이 가장 완벽히 보존된 도시로 꼽힌다.
디오클레시아누스란 로마황제가 서기 303년 성을 쌓고 말년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주피터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한 황제의 당시 삶이 성곽과 조각품 등에 온전히 남아 있다.
신에 이르는 회랑 등 성 안의 공간들은 미로처럼 연결됐다.
황제만의 공간과 병사, 일반인의 생활터전이 뚜렷이 구분됐다.
당시 넓적한 돌에 홈을 파 사용했던 상수도도 보존돼 있다.
빨래를 창밖에 내걸고 성과 어울려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름없었다.
중심부 성당의 3백82계단 종탑.
내려다 보는 스플리트의 지붕선과 바다색이 아름다웠다.
그리고는 가장 오래된 카페 카바나 룩소에서 솔향 짙은 브랜디 한잔.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에서는 잿빛 바위산과 햇빛이 연출하는 환상의 마술을 경험했다.
아침엔 눈이 내린 듯 했다.
이른 오후엔 다시 잿빛이 되었다가 낙조를 받아서는 우리의 홍도처럼 벌겋게 달아오르는 바위산의 색변신이 신묘했다.
두브로브니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땅을 거쳐야 했다.
13세기 베네치아공화국 세력이 남진, 당시의 두브로브니크공화국을 삼키려 했을 때 터키세력이 7km 폭의 회랑을 두고 지킨 것이 굳어진 지역이다.
이곳의 유일한 마을인 네움의 면세점에서는 각종 식품류를 싸게 팔았다.
오후 8시.
두브로브니크 엑셀시어호텔에 짐을 풀었다.
베란다로 나가는 순간 "악" 소리가 튀어 나왔다.
창백한 하현달빛이 반사되는 밤바다, 흰색의 보트, 노란색 조명을 받고 황금의 섬처럼 떠있는 성채가 몽환적이었다.
91년 내전 때 프랑스 학술원장 장 도르메송이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두브로브니크를 지키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유럽의 미래를 얘기할수 있겠느냐"며 포격중단을 절규했다는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호텔조명이 미친 바다는 밤인데도 투명했다.
해양탐험가 자크 이브 쿠스토가 찬미했다는 청정함이 어떤 것인지 실감났다.
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성곽과 건축물, 발길에 닳아 상아 빛으로 반짝이는 3백m 가량의 중심거리에 내려앉은 어둠의 침묵이 장엄했다.
두브로브니크는 이튿날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더욱 빛났다.
전쟁의 상흔은 말끔히 치유돼 있었다.
관광객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골목 마다 자유가 넘실댔다.
뒤편 산 위에서 내려다본 두브로브니크는 화사함을 더했다.
마치 귀부인의 목걸이에 매달린 루비처럼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버나드 쇼는 찬사가 떠올랐다.
"천국을 찾는 사람이라면 두브로브니크에 와서 두브로브니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크로아티아 현지 여행사 아틀라스사의 안내원 블랑코씨는 장난끼 어린 얼굴로 알듯 모를듯한 소리를 했다.
자그레브~플리트비츠호수 국립공원에서 본 내륙지역과 아드리아해와 맞닿은 연안지역의 지형 및 지세가 딴판이란 것이다.
좁은 나라인데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플리트비츠호수 국립공원에서 자다르로 향하면서 블랑코씨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심한 꽈배기길을 거슬러 높지 않게 이어진 산마루를 넘자마자 희한한 세상이 펼쳐졌다.
시선이 닿는 곳은 희뿌연색의 일색이었다.
잿빛 돌사막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키 작은 관목을 인 덩어리 큰 바위무리가 때론 평탄하게 때론 깊은 계곡을 이루며 멀리 내달았다.
바다속 깊은 계곡이 솟아오른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륙쪽이 파스텔풍의 화사한 수채화라면 이쪽은 농담조차 맞지 않은 수묵화에 비견됐다.
노출이 정확한 컬러사진과 초점도 맞지 않은 흑백사진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황량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티토 치하에 국가사업으로 세웠다가 타산이 맞지 않아 폐허로 방치된 알루미늄정련공장의 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그런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자연은 자다르에서 또한번 조화를 부렸다.
자다르는 유럽도시의 화장기 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유의 옅은 주황색 기와를 얹은 주택, 짙푸른 바다위의 요트와 대형 페리, 오랜만에 구름걷힌 하늘과 태양빛.
상상속의 아드리아해 연안도시 모습이 거기 있었다.
"베네치아에의 선물"이란 뜻의 자다르는 북 달마시아지방의 중심지.
연륜이 느껴졌다.
로마시대 때 쌓은 성곽 안쪽은 베네치아공화국 점령시절의 흔적과 겹쳐 있다.
중심은 로마광장.
"로마광장은 1백년전까지만 해도 땅속에 있었다"고 이곳 안내원 야스민카씨는 말했다.
크로아티아 최초(1396년)로 대학이 세워졌으며 크로아티아어로 된 신문의 발생지로서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수녀원 박물관에 전시된 성물(聖物)들이 특이했다.
사람의 팔과 머리 형상의 금.은 조각품들이 많았는데 그 속에 해당인물(이곳의 성인)의 해당부위 뼈조각을 모시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불가의 사리함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길게 늘어선 바위산 허리에 위태롭게 놓인 길을 따라 스플리트로 향했다.
도중에 크르카국립공원에 들렸다.
7개 국립공원(크로아티아는 국토의 7.5%를 국립공원 및 자연보호구역으로 보호하고 있다)중 하나다.
여러개의 낮은 폭포가 잇닿아 물길이 시원했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
3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로마시대 건축양식이 가장 완벽히 보존된 도시로 꼽힌다.
디오클레시아누스란 로마황제가 서기 303년 성을 쌓고 말년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주피터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한 황제의 당시 삶이 성곽과 조각품 등에 온전히 남아 있다.
신에 이르는 회랑 등 성 안의 공간들은 미로처럼 연결됐다.
황제만의 공간과 병사, 일반인의 생활터전이 뚜렷이 구분됐다.
당시 넓적한 돌에 홈을 파 사용했던 상수도도 보존돼 있다.
빨래를 창밖에 내걸고 성과 어울려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름없었다.
중심부 성당의 3백82계단 종탑.
내려다 보는 스플리트의 지붕선과 바다색이 아름다웠다.
그리고는 가장 오래된 카페 카바나 룩소에서 솔향 짙은 브랜디 한잔.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에서는 잿빛 바위산과 햇빛이 연출하는 환상의 마술을 경험했다.
아침엔 눈이 내린 듯 했다.
이른 오후엔 다시 잿빛이 되었다가 낙조를 받아서는 우리의 홍도처럼 벌겋게 달아오르는 바위산의 색변신이 신묘했다.
두브로브니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땅을 거쳐야 했다.
13세기 베네치아공화국 세력이 남진, 당시의 두브로브니크공화국을 삼키려 했을 때 터키세력이 7km 폭의 회랑을 두고 지킨 것이 굳어진 지역이다.
이곳의 유일한 마을인 네움의 면세점에서는 각종 식품류를 싸게 팔았다.
오후 8시.
두브로브니크 엑셀시어호텔에 짐을 풀었다.
베란다로 나가는 순간 "악" 소리가 튀어 나왔다.
창백한 하현달빛이 반사되는 밤바다, 흰색의 보트, 노란색 조명을 받고 황금의 섬처럼 떠있는 성채가 몽환적이었다.
91년 내전 때 프랑스 학술원장 장 도르메송이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두브로브니크를 지키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유럽의 미래를 얘기할수 있겠느냐"며 포격중단을 절규했다는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호텔조명이 미친 바다는 밤인데도 투명했다.
해양탐험가 자크 이브 쿠스토가 찬미했다는 청정함이 어떤 것인지 실감났다.
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성곽과 건축물, 발길에 닳아 상아 빛으로 반짝이는 3백m 가량의 중심거리에 내려앉은 어둠의 침묵이 장엄했다.
두브로브니크는 이튿날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더욱 빛났다.
전쟁의 상흔은 말끔히 치유돼 있었다.
관광객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골목 마다 자유가 넘실댔다.
뒤편 산 위에서 내려다본 두브로브니크는 화사함을 더했다.
마치 귀부인의 목걸이에 매달린 루비처럼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버나드 쇼는 찬사가 떠올랐다.
"천국을 찾는 사람이라면 두브로브니크에 와서 두브로브니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