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영 <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 roockie@unitel.co.kr >

한여름 햇볕이 뜰을 넘어 조금씩 집안을 넘볼 때 어머니는 흰 반죽이 묻은 손으로 나를 부르신다.

밤마다 담을 타다가 낮이면 맥 풀린 듯 축 늘어진 덩굴 사이를 살그머니 들추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푸른 호박이 흠칫 몸을 떤다.

요놈은 아직 어리다.

아니,이건 언제 벌써 이렇게 큰 거야? 마치 내 허락 없이 크면 안되기라도 하는 듯 나는 재빨리 그걸 따서 어머니께 드린다.

그리고 밀가루반죽을 얇게 편 후 돌돌 말아 칼로 써는 바쁜 손을 지켜본다.

얼마나 빠른지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제발 그만 멈추었으면….기다린 보람으로 한 자락을 뭉텅 남겨주시면 나는 그걸 불에 구워 먹었다.

호박을 잘게 썰어 넣고 끓인 그 맛을 잊지 못해 칼국수 집을 찾지만 그 맛은 아니다.

손은 참 대단한 요술쟁이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손의 솜씨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손은 퉁퉁 부은 환자의 몸을 주물러서 고통을 덜어주기도 하고,슬슬 등을 긁어 순식간에 아늑한 천국으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깊은 눈이나 슬픈 눈은 우리를 사로잡고 진짜가 아닌데도 진짜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손은 만질 수 있기에 그보다 정직하다.

그래서 남편을 부추겨 왕을 만들었지만 밤마다 죄의식으로 고통받던 셰익스피어의 맥베드 부인은 손을 씻고 또 씻었다.

후끈한 계단을 내려서면 고래처럼 씩씩대며 들어서는 전동차가 그렇게도 반갑다.

운이 좋으면 열대에서 한 대로 바뀐 듯이 서늘한 공기를 맛볼 수 있고,그보다 더 운이 좋으면 자리에 앉아서도 갈 수 있다.

길게 서있는 사람들 속에 끼어 창 밖을 보다가 문득 내 앞에 시선을 떨구었다.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한 손이다.

얼굴보다 더 정직하게 연륜을 말해주는 그 손은 사십은 넘어 보인다.

핏줄이 울퉁불퉁하고 손마디가 굵고 손톱이 둥글다.

하얀 종이 위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는 그 여자의 머리칼에서 흰 올이 몇 개 보인다.

잠깐 앉았다 갈 전동차 안에서 영원인 것처럼 책을 읽던 그 여자의 손에서 나는 흰 반죽이 묻은 어머니의 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손을 기억의 갈피 속에 저장해 놓는다.

우리를 살게 하는 아름다운 것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