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런 이 땅의 사나이외다" 경성고보 4학년에 재학중이던 심 훈(沈 熏·본명 沈大燮)이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됐다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쓴 시 ''어머님께 드리는 글월''의 한 구절이다.

이 시의 내용처럼 심 훈은 조국독립을 위해 36세의 짧은 생을 바친 민족 예술가였다.

4개월만에 출옥한 뒤 한 때 중국 항저우(抗州) 즈장대(之江大)에 유학한 그는 1923년에 귀국,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했다.

애당초 그는 영화에 몰두해 시나리오 ''탈춤''을 집필했고 2편의 영화에 직접 출연도 했다.

나운규의 ''아리랑''과 함께 무성영화시대의 기념비로 꼽히는 ''먼동이 틀 때''는 심훈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영화다.

소설가로서 심훈의 본격적인 출발은 1932년 충남 당진에 낙향하면서 시작된다.

''영원의 미소'' ''직녀성'' ''상록수''등 세 장편을 해마다 한편씩 내놓았다.

그의 작품에는 민족주의,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저항의식,귀농의지,휴머니즘이 짙게 깔려있다.

이광수가 이상에만 치우쳤던 것과는 달리 그는 행동적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 초기작품에 나타나는 좌익운동의 격렬한 색채는 ''상록수''에 오면 희미해지고 농촌계몽운동으로 탈바꿈한다.

심 훈 만큼 작품을 통해 항일민족정신을 고취시킨 작가는 없을 성 싶다.

제55회 광복절기념식에서 심 훈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이 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먼저 받은 데 비하면 너무 뒤늦은 서훈이다.

공적조서에는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이 최근에야 확인된 것으로 적혀있지만 그가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일제의 판결문이 관행처럼 여전히 독립유공자 결정의 최종근거가 되는 것도 꺼림칙하다.

문학작품만으로는 항일활동을 인정하기 어려웠다는 변명도 구차하게 들린다.

그만큼 사상의 벽이 두터웠다는 이야기다.

남북 화합무드에 따라 그 벽도 이젠 무너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