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 < 소설가.hannak3@hanmail.net >

누가 뭐래도 내가 머나먼 별에서 온 공주라고 굳게 믿던 시절이 있었다.

머나먼 별에서 부하들이 나를 모시러 오면 어깨의 우두자국을 그 증표로 보여주고 이 시련과 작별하길 바랐다.

대체 무슨 시련이기에?

엄마는 말씀하신다.

"착한 언니한테 대들면 되니.동생인 네가 참아야지"

또 말씀하시길 "하나 뿐인 동생한테 그러면 되니? 누나인 네가 참아야지.참는 자에게 복이 있어"

아아 나는 못 참아!

나는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보따리를 쌌다.

제가 안 보이면 별님 고아원에 들어간 줄 아세요.

삐뚤삐뚤한 글씨로 겨우 편지를 써서 엄마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어린이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소풍 때 메던 분홍색 배낭이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과 과자도 넣었다.

그때 나는 함께 지내온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거기서 파생되는 비장감이 섞여 꼬마 독립군에 뽑혀 가는 아이처럼 긴장했다.

그 다음엔 어딘가 높은 지붕 같은 곳에 앉아 나를 모시러 올 친위대를 기다려야 한다.

나 같이 못 생긴 공주도 잘 찾을 수 있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야 한다.

하지만 골목을 벗어난 지 얼마 안돼 느닷없이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접선이 잘 될까.

내가 좋아하는 배낭도 이렇게 젖는데...

그리고 그로부터 한시간 뒤,나는 집 대문 앞에서 비를 피하며 오슬오슬 떨고 있다.

그때 저쪽에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저건 우리 아빠의 발소리다.

아빠는 별나라에서 내려온 친위대처럼 급히 내게 다가왔다.

"아니 왜 여기 있어? 이것 좀 봐라.비를 흠뻑 맞고,응?"

아빠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별나라 공주는 울지 않는 거야.

나는 그 와중에도 괜찮게 보이려고 만화 속 공주처럼 열심히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무얼 했던가.

저 먼 별나라에 가는 대신 이마에 찬수건을 얹고 앓고,엄마와 언니는 친위대처럼 내 옆에 앉아 밤새 간호를 했다.

나는 앓는 중에도 "언니.배낭에 초콜릿 그거 언니 먹어"하면서 끙끙댔다.

그날 밤 별은 뜨지 않고 대신 굵은 비가 후두둑 후두둑 밤새 지붕을 적셨다.

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오래 전이고 너무 그리운 날 밤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