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산을 이루던 한 시절이 있었다.
누워 살아가면서
내 안에 그리운 산 하나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 산은 나에게 늘 푸른 공기와 새와 잎사귀를
전해주었다
이젠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이젠 절망하지 않으리라

불의의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채 20년간 누워 살아온 시인 이충기(47)씨.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엄지와 검지 손가락뿐이다.

그는 불완전한 두 손가락과 입을 빌려 시를 쓴다.

초등학생처럼 삐뚤삐뚤한 글씨지만 그의 시는 세상을 밝히고도 남는 등불이다.

가슴 저미는 고통의 행간 사이로 사랑과 희망의 빛이 환하게 비친다.

성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삶의 힘을 되찾는 동안 그는 묵묵히 다음 시를 준비한다.

그의 시집 두권이 수많은 독자들을 울리고 있다.

지난해 나온 첫시집 "사랑하는 사람에게"와 두번째 시집 "내 아픈 사랑을 위하여"(좋은날미디어)가 입소문을 타고 10만부 가까이나 팔렸다.

최근 "가시나무"의 가수 조성모가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그의 시를 낭송한 뒤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입 안에서 아낀답니다/감사하다는 말/마음 속에서 간직한답니다/고맙다는 말/(중략)/훗날 내 삶의 마지막 날에/최후의 한마디만/겨우 할 수 있는 시각에/유언처럼 말하겠습니다/그때/(중략)/크나큰 울림으로/고맙다고 말하겠습니다/감사하다고 말하겠습니다"

두번째 시집에 실린 "그때 유언처럼 말하겠습니다"가 낭송되는 동안 이소라와 조성모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부산에서 우연히 프로그램을 본 이씨도 얼굴이 뻣뻣해질 정도로 놀랐다.

방송 이후 시집주문이 쇄도했다.

1주일만에 3천부 이상 더 나갔다.

첫시집을 찾는 사람들까지 부쩍 늘어났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는 스물일곱살 총각선생님이었다.

부산교대를 졸업하고 부곡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는 지하철 공사장을 지나다 철판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목뼈와 다리가 부러졌고 중추신경은 마비됐다.

의료진은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했다.

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푸르고 창창한 나이.

사랑했던 여자를 돌려보내고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마저 애써 지우던 그에게 유일한 생명줄은 문학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허무한 것은 없다/가슴 속에 남은 말이여/못 다 덮은 아픈 기억이여"("내 아픈 사랑을 위하여.1"부분)

5년간 병수발을 하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함께 죽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이 가슴에 맺혔다.

절망의 끝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산골소녀 시인 옥진이를 알게 됐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번째 결실은 94년 월간 "샘터"에서 주최한 "올해의 인간승리상" 수기 당선이었다.

"사람의 사랑을 생각하다/하루종일,뜨거워져 오는 눈시울/거울 앞에서 눈물을 닦다/부질없이 부질없이 내가 살아온/생의 지문을 더듬어본다/산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내게도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던가/더듬어보면/그냥 빗길인듯 미끄러지는 생의 아팠던 날들"("사랑을 생각하다"부분)

그의 수기를 읽고 밤새워 울었다는 한 여성이 찾아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박안젤라.

그녀는 평생 반려자를 자청했다.

거듭된 고사끝에 "천사의 마음"을 받아들인 그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여자를 곁에 붙잡아두는 게 괴로웠다.

해맑은 얼굴로 과일을 깎는 그녀 옆에서 그는 고통과 위안이 버무려진 시를 썼다.

어떨 때는 "떠나라고 떠나라고/몇번씩 말을 하려고 하지만/차마 입 밖에 건널 수 없는 이 지독한 아픔을/다스리는 날이면/내 몸에 고통의 꽃이 돋아나는 것 같다"며 "나는 잊기 위하여/살아가는 법을 배우느니/눈물이 말라/바닥이 보일 때까지/나를 깨끗이 잊으라"고 절규했다.

시집은 온전히 그의 손과 팔이 돼주었던 박안젤라에게 바치는 영혼의 시편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안젤라의 아들이 뇌막염에 걸렸다.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가 떠난 빈 자리에 시인은 또다시 혼자 남았다.

"눈물이 산을 이루던 한 시절이 있었다/(중략)/누워 살아가면서/내 안에 그리운 산 하나를 만들기 시작하면서/시를 쓰기 시작하면서/그 산은 나에게 늘 푸른 공기와 새와 잎사귀를/전해주었다//이젠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이젠 절망하지 않으리라"("눈물에 대해"부분)

그는 "시를 쓰지 않았다면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며 "두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일은 한마디로 고통이었지만 그런 시가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떠남은 나에게 익숙하다/이미 몸에 배긴 습관이다"라고 자신을 추스린다.

그가 어두운 방 안에서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는 동안 바깥 세상에서는 봄꽃이 무심히 피고 햇볕은 따스하게 부서져 내린다.

그러나 한달에 90여만원의 간병비용과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한 미래가 그를 견디기 힘든 무게로 짓누르고 있다.

몇년째 치료비를 지원해온 출판사는 그에게 힘을 줄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02)392-2588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