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된장찌개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맛있으면 세계에서 제일 아닙니까"

소설가 이문열씨가 "안동촌음식"이라고 소개한 밥상엔 "짠지"(김치)와 함께 제주 옥돔이 올라와 있다.

종가집 제삿상에서나 봄직한 유기.

순식간에 두 그릇을 비운 이씨는 어제부터 담배를 끊었다며 금연초를 피워 문다.

"아래층에 내려 가실래요. 집사람이 자수를 하는데 볼만 합니다"

경기도 이천 신둔면 장암2리.

이씨가 거처하는 부악문원 안채엔 각종 도자기와 자수 병풍이 즐비하다.

뒤뜰엔 커다란 가마솥과 항아리도 있다.

솥은 부악문원 학생들을 위해 국을 끓일때 쓰는 것.

김장김치를 30포기나 해도 부족하다는게 안주인의 말이다.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 일으킨 장편 "선택" 이후 3년만에 신작 장편"아가(雅歌)-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민음사)를 발표한 소설가 이문열씨를 찾아 이천 부악문원을 방문했다.

흙먼지 나는 길가에 자리잡은 부악문원은 흔한 문패 하나 달고 있지 않았다.

아는 사람만 알아서 찾아 오라는 뜻일 터.

-부악문원은 요즘 어떻습니까.

"함께 숙식하며 고전을 공부한다는 것이 신세대한테 잘 안맞나 봅니다.

최근 학동이 줄었다는 기사가 난뒤 지원자가 70여명이나 더 몰려들었습니다"

-신작 "아가"가 재미있다는 소문이 자자한데요.

"이번 소설은 촌바보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당편이는 소아마비를 앓아 거동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회적 생산은 물론 여성으로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죠.

하지만 공동체는 당편이를 받아들입니다.

공동체의 빈 틈새를 당편이가 채운 것입니다"

-당편이란 이름은 반편이를 연상시킵니다.

"기우뚱, 철퍼덕하는 걸음걸이는 "당편이 물 이고오나 마나"란 고향의 유행어를 만들어 냅니다.

물동이의 물을 모두 흘리기 때문이죠.

밭을 매도 작물을 뽑고 풀을 남기는 통에 "당편이 조밭 맬듯 말듯"이란 말도 나옵니다.

그동안 저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영웅을 그려 왔습니다.

"삼국지" 등이 상위모방에 근거한 로망(roman)이라면 이번 소설은 바보 건달 등을 하위모방한 일종의 피카레스크(picaresque)입니다"

-부제의 "희미한 옛사랑"은 잃어버린 공동체를 의미합니까.

"예전엔 동네마다 반편이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앉은뱅이 청맹과니 언청이 외팔이 미치광이 맹추라 불리는 사람들이죠.

이들은 지름을 달리하는 동심원들의 겹에서 살았습니다.

백정이 제일 바깥쪽, 그 안쪽은 거지, 그 안쪽은 중증장애인, 그 안쪽은 생산을 도울 수 있는 불구자 식으로 겹겹이 층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문둥이는 소록도로, 장애자는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공동체가 기꺼이 부양했던 사람들은 이제 TV의 불우이웃돕기로 만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온전한 것일까요.

성하다는 사람들도 알고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양파를 하나씩 까면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지요.

오늘날 도시 공동체는 허망한 빈 껍데기뿐입니다"

-남은 사람은 정상이라고 우기도록 강요받고 있을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조금씩 불구라는 말인데요.

"우리 고향(경북 영양)에 (이)춘풍회라고 있습니다.

일종의 숙맥 모임인데 회장이 누군지 아십니까.

입만 열었다하면 시경이 줄줄 나오고 바둑도 군내에서 최고인 양반입니다.

똑똑한 어른이 회장이 된 것은 작은 각시 집에 가다가 한복 바지 대님이 풀어져 그 안에 담아 가지고 가던 쌀이 길가로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놀리기 시작했죠.

부회장이란 사람은 버스에다 두루마기를 벗어놓고 내렸답니다.

아마 저도 고향에 남아 있었더라면 춘풍회 총무쯤은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편이는 "선택"의 장씨부인과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현대여성들은 사회경제적 생산만 중시한 나머지 성적 역할에 무관심합니다.

당편이는 어느쪽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는 장애자이지만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때 인간으로서 온전해진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당편이를 하나의 기호로 설정했는데.

"기호는 존재의 발신이며 인지는 타자의 수신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선 사람이 1950년에 태어나 2000년에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얼마간 기억됐던 존재로 남는 거죠"

-발신과 수신뿐만 아니라 회신의 의미까지 포함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회신이라는 말 대신 소통이라는 표현을 썼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 누구 또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지 않은 존재는 없지 않습니까.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존재를 존재답게 해주는 것이 소통이지요"

-한참 웃다보면 눈물이 나는 소설입니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쓰다가 우스워서 혼자 많이도 웃었죠.

당편이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일부는 고향마을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구요.

소설가 심상대씨는 좋은 작가가 되려면 이야깃거리 많은 고장에서 태어나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노래 제목이죠.

"아가는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구약성서에 나옵니다.

원래 부악문원 학생들이 신춘문예 도전할 때 같이 시작한 것인데 생각보다 길어져서 이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오는 10월 영양에 부악문원에 이은 제2의 서사 여산문원이 들어섭니다.

60여칸짜리 한옥입니다.

일대를 유교문화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영양군의 사업이죠"

인터뷰를 마친 이문열씨는 요즘도 술을 많이 마시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평생 술을 마셨는데 아직도 마실 술이 남아 있는 것 같다"며 출판사가 있는 서울을 향해 바삐 떠났다.

이천=윤승아 기자 ah@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