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일본 민간금융회사 ]

필자는 "한일민간금융회사" 설립목표 시한을 1971년말 이전으로 잡아 전력을
기울였다.

71년말이면 닥칠 "한일청산계정"의 부족액 수천만달러를 새로 생길 회사를
통해 조달할 목적이었다.

대통령 승인도 얻었다.

일본 금융계가 움직였다.

처음은 한.일 민간자본으로 작게 출발할 작정이었다.

나중에 아시아개발은행과 세계은행까지 추가출자를 유도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런데 예상 밖의 암초를 만났다.

국내 경제계로부터 반대공작이 일어난것.

산업은행 총재까지 지낸 N씨가 선봉에 섰다.

여기에다 대한상의 중진회원들이 반대공작에 동조했다.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전경련 주도의 "한일민간금융회사"까지 설립되면 일본
자금이 대기업에 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들 반대파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자신들의 뜻을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한.일 문제에 있어선 신중을 거듭하는 일본 재계는 적극적 자세에서
물러섰다.

순산할 것으로 기대됐던 "한일민간금융회사"는 끝내 유산됐다.

필자는 지금도 당시의 결과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아쉬워하고 있다.

민간 주도로 세계 각국의 금융기관과 합작해 이들과 자금 파이프로 연결된
"금융회사"를 설립, 발전시켰더라면 IMF와 같은 위기를 예방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화제를 돌려 김학열 부총리 시절의 "경제자문회의"에 대해 한가지 덧붙일
게 있다.

첫 회의 때다.

회의는 부총리실에 붙어있는 4평가량의 독방에서 열렸다.

그는 자리에 앉자 두툼한 메모책을 불쑥 내밀었다.

"이 속에 내 경제정책 구상의 재료는 죄다 들어있소"

그러면서 그는 메모책의 1~2 페이지를 열어 보였다.

깨알같은 글씨에 통계숫자까지 촘촘히 쓰여 있었다.

필자는 속으로 "대단히 공부하는 친구이구나.

대통령 경제가정교사를 하자면 저 정도의 준비는 해야 할 것이다"라고
짐작했다.

"나는 지금 24가지 정책 과제를 갖고, 각부 장관과 고급 공무원을 채찍질
하고 있거든..." 자못 득의만만한 말투였다.

필자가 반론을 제기했다.

"여보, 김부총리.경제총수라는 부총리가 24개씩이나 되는 정책과제를 챙기면
관계장관은 무엇하러 있는 것입니까"

필자의 당돌한 반론에 머리회전이 빠르다는 김부총리도 일순 주춤했다.

"나 같으면 부총리쯤 되는 위치에서 세 가지만 챙기면 족하리라고 생각하오.
첫째 경제안정, 즉 물가 금리 환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문제이지요. 둘째는 산업정책인데 어떤 산업을 키워 3천만명을 먹여 살리는
문제입니다. 셋째 국제협력 문제로 세계 최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수모를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전략적 대외협력 체제 말이오"

이렇게 일사천리로 필자는 의견을 말한 뒤 부총리의 반응을 살폈다.

입이 걸기로 이름난 김 부총리였다.

하지만 그날따라 남의 말을 들을 자세로 변했다.

사실 "경제자문회의"에서 갑론을박이 없으면 회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필자가 뒤에서 세가지 경제정책 대강을 지적한 건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김부총리가 열거한 24개 과제는 모두 다 중요했다.

하지만 경제란 상호 연관되고 인과법칙이 작용하는 만큼 전체틀속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대통령의 브레인인 김부총리에게 경제운영의 철학과 원칙을 심어주고
싶어서였다.

그 뒤에도 경제자문회의에서 김부총리의 24개 과제와 필자가 제시한 3대
원칙을 서로 배합시켜 활발한 토론이 펼쳐졌다.

현실에 입각한 정책들이 속속 개발됐다.

이러다보니 뒤에 숨어서 진행된 경제자문회의가 장관들 사이에서 관심
대상이 됐다.

눈치 빠른 장관들은 필자가 아는 국장들을 시켜서 자신도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청탁해 왔다.

1970년초로 기억된다.

주한미국대사관 경제공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 즉 "왜 일본하고만 "민간경제협력위원회"를 만들었느냐"는 것이었다.

<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