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 이용범 교수는 60년대말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처용은 기록에 표현된 용모나 여러가지 정환으로 미루어 아라비아 상인중 한
사람이었고 신라때의 경주(동경)는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드나들며
흥청거리던 동양의 국제무역도시였다는 내용이다.

그는 선박들의 정박했던 곳은 울산항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당시 사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을 웃어넘겨버렸다.

그러나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는 경주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양식의 유물을
예로 들면서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는 논평을 해 주목을 받았다.

이 두 학자는 이미 고인이 됐지만 지금 그들의 주장은 학계의 정설처럼 돼
있다.

신라와 중국 서쪽의 나라들인 서역 사이에는 중국을 통한 간접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직접 무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료도 있다.

실제로 이슬람의 기록인 "왕국총람과 지도"에는 "신라는 중국의 맞은 편에
있으며 기후환경이 좋아서 산이 많고 금이 풍부해 무슬림이 많이 정착하고
인삼 옷감 말안장 토기 칼등이 많이 산출된다"고 적혀 있다.

또 경주에 있던 낙타가 서역의 교역들과 함께 일본에 전해진 사레가
"일본서기"에도 실려있다.

미술사가들은 그동안 현존 신라유물가운데 유리제품 석조물 토기 토용
등에서 서역의 역향을 받은 것들을 지적해냈다.

곡예하는 동작을 표현한 토용은 아라비아 쪽의 전통놀이임도 밝혔다.

석조물중에는 흥덕왕릉이나 괘릉의 석조 무인상이 아라비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고전적 얘기가 됐다.

금속공예품중에서도 59년 감은사지 서탑에서 나온 사리함여 새겨진 사천왕상
의 모습, 갑옷 등이 서역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엊그제 처음 공개된 감은사지 동탑 금동사리구는 앞서 발굴된 서탑의
것보다 여성적이어서 현미경으로만 보일만큼 정교한 세공이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1천3백여년전 외국문물을 받아들여 그보다 더 정교하게 재창조해 낼 수
있었던 신라 장인들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가 놀랍기만 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