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 일자바지는 파스텔톤 스웨터랑 같이 입으면 진짜 예뻐요. 괜히
딴데가서 안 어울리는 옷 사서 후회하지 말고 우리집에서 사요"

14일 오후 3시께 두산타워의 지하매장 "르 꾸숑".

고등학생쯤 되보이는 여자 손님 두명이 거듭되는 판매사원의 권유에 마침내
지갑을 열고 만다.

"내일 오면 이 옷 없다"는 한마디 말로 손님들의 발길을 묶은 주인공은
판매사원 윤여희(20)씨.

매장을 찾은 손님중에서 적어도 3명중 1명은 물건을 사게끔 만든다는 그녀는
5개월의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두타에서 알아주는 판매왕이다.

윤씨의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매장주인들은 대개가 늦은 밤에 나오기 때문에 이 시간은 판매사원들이
지킨다.

하루 10시간을 일하고 받는 월급은 식대를 포함해 70만원 전후로 노동량에
비해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윤씨의 생각은 다르다.

"내 매장을 차릴수 있는 목돈이 모일 때까지는 장사를 배우는 기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쉽지 않다"는게 그녀의 야무진 생각이다.

동대문 일대에서 판매되는 상품들이 대부분 2~3만원대의 저가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날마다 수많은 고객과 맞부닥치며 하룻밤에 수백만원씩을 벌어
들이는 판매사원들은 신화창조의 최첨병이다.

그들은 또 디자이너와 젊은 사장들 못지않게 거상의 꿈을 꾸는 예비부자다.

두산타워 지하의 "옷짱"이라는 여성복 매장에서 만난 강은희(27)씨는 이같은
꿈에 한 발 다가선 인물이다.

내년 2월에 자신의 매장을 낼 계획인 그녀는 모델 뺨치는 외모부터가 범상치
않은 경력을 가졌음을 짐작케 한다.

"모델 매니저로 5년정도 일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장쪽 일을 우습게 봤다는 그녀는 장사하는 친구의 권유로 밀리오레에서
판매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으며 이때 동대문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

예전 직업도 패션에 관계된 일이라 도움이 많이 됐다는 강씨는 판매만 하지
않고 매장 인테리어 디스플레이까지 책임지고 있다.

강은희씨 뿐 아니라 동대문의 여자 판매사원들중에는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
들이 즐비하다.

훤출한 키에 시원스런 몸매, 세련된 화장, 위로 틀어올린 긴머리는 동대문
판매사원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정평이 나있다.

뛰어난 외모의 "미녀군단"이 포진한 이유를 상인들은 "판매사원이 마네킹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대문의 매장은 백화점들과 달리 마네킹 세울 공간도 없이 비좁아 판매사원
들이 그 대역을 한다는 설명이다.

판매일선에는 여성들만 있는 게 아니다.

밀리오레 6층의 가방가게 "메고"에서 일하는 안홍준(24)씨처럼 시장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젊은 청년도 적지않다.

성균관대 기계설계학과 95학번인 안씨는 작년 8월 군제대후 학교 대신
동대문시장으로 들어왔다.

"의상학과에 진학해 내 브랜드를 갖고 싶었던 원래의 꿈을 조금 다른 방법
으로 실현하고 있다"는게 안씨의 말이다.

그는 한두달후 비록 한칸이지만 자신의 매장을 열게 된다.

밀리오레 3층 체리파이(여성복)의 임종훈씨도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가수들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다가 캐나다에서 패션머천다이징을 2년 정도
공부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유명 패션회사의 프로포즈를 받았지만 고객을 직접
만나면서 배우겠다는 생각에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판매사원들의 24시를 들여다 보면 대기업 신입사원이나 돈많은 상인 못지
않게 꿈과 희망이 넘쳐 흐른다.

하지만 판매일선에는 살풍경한 모습이 여전히 존재한다.

상인들이 들려주는 판매사원의 평균 수명은 두달.

고되고 힘든 업무에 하루만에 그만두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도매위주의 상가에서는 손님이 판매사원들과 거친 입씨름을 벌이는 광경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막무가내형 손님과 판매사원을 무조건 깔보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 상할
때도 많지요. 그렇지만 내일을 준비할 수 있잖아요"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한 판매사원이 들려준 인간마네킹의 속내다.

< 설현정 기자 so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