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업공사가 외국의 투자전문 회사와 추진해온 계약협상을 막바지 단계에서
백지화하고 다른 회사를 선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당초에 합의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한 푼의 달러라도 더 확보하고 우리보다
앞선 경영기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외국인들을 상전처럼 모셔온 관행으로
보면 대단한 파격인 셈이다.

그러나 그런 약점을 활용해 얄미울 정도로 배짱을 내밀던 외국인에게 그들의
훈수대로 원칙을 그대로 지켰다는 점에서 많은 국민들이 모처럼 속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성업공사는 금융기관과 정부가 출자해 만든 비영리 특수 공법인으로 요즘은
이미 조성된 공적자금 64조원의 절반 이상을 관리할 정도로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을 처리하는 일이 업무의 대부분이다.

이를 위해 외국인과 합작으로 기업구조조정 전문회사(CRC)와 자산관리회사
(AMC)를 설립키로 하고 지난 7월부터 외국 회사들과 협상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정해진 날자에 현금을 입금시키지 않거나 또는 자산의 가격을
무리하게 깎으려 하자 투명성과 공정성에 어긋난다며 백지화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관련 법은 물론 계약상으로도 전혀 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감독관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성업공사가 과감하게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을 높이 평가한다.

외환위기 이후 부쩍 늘어난 외국인들과의 협상에서 그 주체가 정부든
공기업이든, 우리측은 항상 질질 끌려다닌다는 지탄을 받아왔다.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는 그들과 달리 헛된 명분에만 매달리다 배는 주고 그
속만 빌어먹는 식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우리의 사정이 다급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내실보다는 한건주의에 집착하는
풍토가 이를 조장한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제일은행이 팔리기 몇달 전부터 관료들의 매각성사 발언이 수차례나 나오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성업공사가 공적자금을 최대한 빨리 회수하기 위해 외국인들의
선진 노우하우를 활용하려 하자 외국인들이 이를 오히려 약점으로 여기고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자아내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외국과의 협상에서 실속을 보다 알뜰하게 챙겨야 한다.

협상의 주도권도 허술하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상급기관에 대한 보고나 국민에 대한 생색내기를 위해 잇속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이유가 없다.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는 곤란하지만 외국인이라고 덮어놓고 천사처럼
여기는 일은 더더욱 금물이다.

거래는 반드시 상업적인 바탕에서 이뤄져야 한다.

IMF 직후와 달리 우리 사정도 웬만큼 펴지지 않았는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