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교수 >

세계인구가 60억명을 넘어섰다.

그 기록적 날짜를 두고 미국과 유엔의 전문가들의 의견이 각각 지난 6월과
오는 10월12일로 엇갈린다.

인구통계가 정확을 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960년이래 세계인구가 두배나 늘어나 하나밖에 없는 지구가 만원사례
지경이다.

다행히도 인구증가율이 점점 둔화되는 추세다.

세계인구가 2040년께 75억명 수준에서 절정에 이른 다음 감소세로 돌아
선다는 전망이다.

이민 입국이 많은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 인구는 그보다 일찍 줄어드는 반면
개도국, 특히 사하라 이남 빈곤지역의 인구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초 세계인구의 평균 연령이 20세에 불과했던데 비해 2050년에는 곱절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같은 인구고령화는 가족구성 노동시장 연금 사회복지 등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한다.

T R 맬서스는 "인구론"(1798년)을 통해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식량의 증가에 비해 줄잡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증가 때문에
인간의 미래는 불행하다고 예언했다.

시간을 길게 잡고 복리로 계산하면 때론 가공할 결론을 얻는다.

몇 해전 어느 전문가의 장난기 어린 계산은 이렇다.

가령 기원전 1만년 전 아담과 이브가 만나 매년 1%의 인구증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오늘날 지구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람에 파묻혀 지구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는 지름이 몇천 광년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인간
고깃덩이 공으로 빛의 몇 배 속도로 팽창하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맬서스의 비관론은 빗나갔다.

식량부족 영양실조 질병 전쟁 등으로 인구가 오랫동안 정체하거나 감소했던
덕분에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인구증가가 억제되었다.

세계인구의 지속적 증가는 인류 역사상 최근 수세기에야 가능하게 되었을
따름이다.

자연자원의 수확체감 경향을 압도하는 꾸준한 영농방식의 과학적 개량,
의학 및 공중위생 발달 등의 덕분이다.

비좁은 지구상에 늘어난 인구가 공존하려면 평화공존의 세계질서, 자원이용
의 지구 공동체의식이 필수불가결하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살아가는 자세를 배워야 산다.

경제 정치 안보 등 다방면으로 세계공동체의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며 함께
공존 번영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요청된다.

소아병적 국수주의와 국내산업보호 일변도의 중상주의도 낡은 시대의
찌꺼기다.

한반도는 협소하다.

22만평방km의 좁은 국토가 반으로 잘려 더욱 비좁다.

1935년 평방km당 1백.5명이 살던 국토에 95년에는 4백49.4명이 사는 꼴이
되었다.

99년 현재 4백60명 수준으로 추정되는 한국의 인구밀도는 반갑지 않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국토가 좁은 만큼 좁은 국토를 넓게 쓰는 슬기가 필요하다.

건축물의 고층화, 지하공간 활용, 분묘제도 개선 등 물리적 공간활용은
물론 정신적 공간의 개발도 소망된다.

인구밀도가 낮은 선진국형 환경논리를 인구과밀국에 그대로 관철하려는
것은 무리하다.

근래 물의를 빚고 있는 간척지 개발이나 동강댐 건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도시의 공동체 생활에 쾌적한 조건을 제공하도록 서로 노력하는 일이 중요
하다.

주행하는 자동차 소음, 주거지 잡상인 소음, 심야 고성방가 따위는 협소한
국토를 더욱 좁힌다.

길거리 보행자의 어깨 넓이와 팔놀림도 남을 의식해야 한다.

어깨동무 팔짱끼기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문화인은 좁은 길에서 가로걷기보다 세로걷기를 지키며 바쁜 사람은 앞설수
있도록 비켜설 줄 안다.

제한된 공간에 서식하는 동물의 과잉증식은 서로 물고 뜯고 살생하거나
자해행위를 해 멸종위기를 초래한다.

이따금 해외토픽에 등장하는 돌고래의 떼죽음도 이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요즘 우리사회에 창궐하고 있는 각종 범죄가 더욱 흉악해지고 있다.

"막가파"형 범죄가 늘고 있다.

신창원같은 범죄자가 우상화되고 있다.

더구나 한국인은 평등주의 성향이 강한 국민이다.

남 잘되고 앞서가는 꼴은 그냥 못 본다.

따라잡으려는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남의 갈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회질서
파괴다.

질서가 있어야 수많은 거래자들이 모여 거래하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
된다.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승부가 명쾌해야 한다.

승자의 아량도 중요하지만 패자가 시장 판정에 승복하고 다음 기회에 보다
값싸고 질좋은 상품을 가지고 다시 겨루겠다는 깨끗한 경쟁정신이 실종되고
있다.

지난날 정부는 승부를 조작했다는 누명을 벗기 어려웠다.

지금 정부는 과연 공정한가.

사회전반이 달라져야 21세기에 생존한다.

최근 우리는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을 치르면서 "창조적 파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21세기에 걸맞은 창조의 큰 밑그림없이 서둘러 허무는데
치우쳐 있는 측면이 없지 않은가 반성해 볼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