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 제1차 한.일 경제간담회 ]

66년 2월 17일, 제1차 한.일합동경제간담회가 게이단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일본측에서는 국제회의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사자가 게이단렌
회장, 아다지 일본 상의 회장, 미즈카미 일본무협 회장 등 3단체 회장이 모두
참석했다.

나이가 여든에 가깝거나 넘은 원로들이다.

일본 경제의 주역들이 60여명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았다.

작년말께 만난 미국 경제인들로부터 받은 분위기는 온화하나 세계에
군림하는 듯 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일본 경제인은 겉으로는 겸손하지만 속에 비수를 품은 것 같았다.

첫날 회의의 하이라이트는 임문항 부단장의 기조연설이었다.

"한일관계의 과거, 오늘 그리고 전망"으로 제목 자체가 매우 예리하고
도전적인 느낌을 줬다.

더욱이 격조높은 내용과 문장력은 일본측 참가자나 기자들까지 매료시킬
정도였다.

이 기조연설만으로 이번 행사가 성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임문항 회장의 연설내용은 일본의 비위에 맞추기보다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진정한 반성위에서 새출발을 촉구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은 이렇게 가식없는 비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충격적인 감명을 줄 수밖에...

이튿날 오사카, 간사이 지방 간담회에서도 똑같은 기조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사실 임회장은 이 연설 준비에 여간 노심초사 한 것이 아니다.

연설하는 날 새벽까지 한국말과 일본말 원고를 다듬었으며, 통역여부를 놓고
필자와 다각도로 검토했다.

임문항 회장은 고학으로 일본 도쿄대학 법과를 졸업, 일본 고등문관 시험
(한국의 고등고시에 해당)에 합격한 이름 날린 수재였다.

해방후 초대 상공차관, 농림부장관을 지낸다.

홍사덕 국회의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80년대에 일본어로 자서전도 낸다.

이를 읽은 필자의 일본 친구는 이렇게 명문으로 쓰여진 전기는 읽어 본 적이
없다고 극찬했다.

경제인협회 부회장이 된 것도 선배인 김용완 회장의 권유에 굴복(?)한
것이다.

당시는 작은 선박회사와 농산물을 취급하는 상사를 갖고 있었다.

하루는 필자와 점심을 나누면서 이런 실토를 했다.

"여보 김국장", "기업은 학식만으로 되지 않아. 당장 집어 치우고 싶은데
공부한 사람은 사업 못한다는 비웃음을 살까 봐 이렇게 붙들고 있소"

오찬이 끝날 무렵 필자의 안내를 받아 한 일본인이 김용완 단장을 찾는다.

일본 야기 상사의 스기미찌스게 사장이었다.

김단장을 만나자 여러사람 앞에서 90도 각도로 큰절을 하다시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아보니 이분이 바로 김동조 대사 상대였던 한일국교정상화 교섭단
일본측 대표였다.

이때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야기상사는 경방과 면사 등을 해방전부터 장기간 거래를 해 온 사이였다.

양측은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채택키로 한다.

그런데 필자는 공동성명작성 경험이 없어 난감했다.

일본측 눈치만 살폈다.

필자의 상대인 고도 전무는 국제회의 전문가답게 공동성명 초안을
구술하다시피 했다.

필자는 초라함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한국경제계 실무 대표라는"뚝심"하나로 간신히 버텼다.

이후 국제회의를 3~4회 하고보니 필자도 공동성명을 구술할 수 있게 됐다.

도쿄에 이어 오사카, 간사이 경제간담회는 마쓰시다 전기 창설자 마쓰시다
고노스께 회장의 강연으로 시작된다.

도쿄 첫 회의에서 임문항 부단장의 기조연설이 너무 큰 인상을 주어,
"경영의 신"이라는 마쓰시다 회장을 내세운 듯 했다.

마쓰시다 회장은 "고객중심의 경영"이 성공비결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강연을 마친 마쓰시다 회장은 우리 일행을 회사 입구로 안내했다.

네덜란드 필립스사와 기술제휴계약 기념패를 자랑스럽게 보여 줬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마쓰시다가 필립스사를 앞지르고 있다.

한일협력을 통해 일본에서 이 비결을 배워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니겠는가...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