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일.

소설가 구보씨는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어젯밤 그는 딸 아이로부터 이집트 조각상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을
제대로 못해 쩔쩔 맸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이집트
조각상을 불러냈다.

<> 진정한 문화민주주의 시대로

조각상에서는 제왕의 품격이 느껴졌다.

황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진귀한 유물이었다.

구보씨는 그 보물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허공에 뜬 3차원의 가상현실(VR)이다.

상하좌우 생김새며 미세한 특징들이 한눈에 드러났다.

예전 같으면 귀한 조각품을 직접 보려면 비행기로 현지 박물관까지 날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방에 앉아서도 모든게 가능하다.

단순히 모양새만 보는게 아니다.

재질이며 순도, 관련 자료들도 순식간에 알 수 있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듯 앞에 놓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찬찬이 뜯어볼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집에 앉아서 모나리자를 보고 유명 작가나 거물 스타들도
언제든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누구나 문화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시대.

다중(Mass)과 문화(Culture)가 만나 시공을 뛰어넘는 매스컬처(Mass
Culture)의 세기를 연 것이다.

이는 곧 특정 계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문화예술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
하고 참여하는 광장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진정한 ''문화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했다.

<> 누구나 창작자이면서 수용자

문화예술의 공급과 수요 개념도 바뀌었다.

누구나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고 누구나 남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따로 없다.

영화만 해도 완성된 필름을 극장에서 일방적으로 보기만 하던 방식에서
쌍방향 대화 방식으로 바뀌었다.

문화예술은 시대정신을 가장 예민하게 반영한다.

예술가들은 컴퓨터의 무궁무진한 능력과 가상현실 세계를 개성적인 관점에
통합시키면서 문화의 혁명을 일으켰다.

새 것의 기술을 옛 것의 가치에 적용시키는 흐름이 정착됐다.

더욱이 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도 무너진지 오래다.

"퓨전" "하이브리드" 개념에 따라 장르간 혼합과 영역허물기가 가속화됐고
문화의 발신자와 수용자 사이에도 벽이 없어졌다.

<> 창조적 유추능력과 카피캣

홀로그램 앞에서 상념에 잠겨 있던 구보씨는 점심식사후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미술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물론 집에서 월드와이드웹으로 가상 화상을 통해 하루 종일 작품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은 실물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한 쪽에는 고전적인 회화작품과 조각이 전시돼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이른바 "진화적 미술"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국 조각가 라탐이 돌연변이 유발 유전자를 원용한 "뮤테이터(Mutator)"를
개발한 이래 미국 컴퓨터과학자 심즈의 DNA 기법으로 한 차원 승화된 첨단
미술세계.

여기에 사람 마음의 연합과정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본뜬 "카피캣
(Copycat:유추능력을 가진 흉내내기)" 기법이 가세했다.

유추는 예술과 과학에서 창조적 능력의 공통적인 원천이다.

이것을 개발한 호프스태터는 인간의 뇌에 필적할만한 컴퓨터가 나오면
사람의 창조적 사고과정을 프로그램으로 모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가능한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마거릿 보덴의 표현처럼
"컴퓨터로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거부하면 우리는 흥미롭고 아름다운
수많은 작품들을 잃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 모차르트의 42번 교향곡

햇살이 기울자 구보씨 가족은 전시장 옆에 있는 "뉴런 노래방"으로 갔다.

구보씨는 마이크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음치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자못 위풍당당하다.

컴퓨터의 디지털 변환장치를 빌리면 유명 가수 못지 않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첨단 전자기술을 이용한 하이퍼 악기가 등장했고 몸만 움직이면 연주되는
"제스처 오르간"도 생겼다.

MIT 미디어연구소에서 만든 특수 악기를 이용하면 바이올린 켜는 법을
몰라도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모차르트는 41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러나 컴퓨터는 모차르트의 42번째 교향곡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예술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일은 10만줄의 컴퓨터 부호를 작성한 끝에 엠미(EMI:음악적 지능의
실험)를 개발한 미국 작곡가 데이빗 코프에 의해 이미 준비됐다.

컴퓨터가 모차르트 교향곡 41개를 하나하나 분석한 뒤 42번째 곡을 유추해
낸 것이다.

뉴밀레니엄 음악은 오감의 영역을 뛰어넘는 초공감각적 비트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다.

<> 영상.스토리 자유자재로 클릭

오후 5시.

특수화면이 설치된 "밀레니엄 극장"의 영화는 쌍방향 대화형으로 진행됐다.

딸 아이가 별도 부스 안에서 리모콘으로 스토리 선택 버튼을 연신 눌러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과 사건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여자가 남자를 얻을까"라는 대목에서 "예" 버튼을 눌렀고 딸
아이는 연적을 따돌리는 쪽으로 줄거리를 끌어갔다.

구보씨도 소설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가며 열심히 스토리 게임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는 21번째 클릭부터 정신없이 달라지는 영화 줄거리를 따라가다가
결국 버튼 누르는 일을 중단했다.

이렇게 종횡무진으로 파생되는 스토리의 미로 속에서 주인공이 누구인지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종합예술이라는 영화는 그를 더욱 신비로운
상상의 세계로 끌고갔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