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 중앙대 교수 / 경제학 >

8.15 광복절을 맞아 김대중 대통령은 새 시대 우리나라 경제의 미래상을
그리는 경축사를 발표했다.

과거 누구도 성취 못한 재벌개혁을 완성하는 대통령이 되고, 중소.벤처기업
및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구축해 나갈 것을 약속했다.

2백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민소득을 1만2천달러 수준으로 올릴 것도
공언했다.

부패척결, 형평사회, 그리고 생산적 복지사회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새 천년의 시작을 앞둔 1999년에는 모든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IMF 위기경제의 늪 속에서 지친 우리 국민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이
간절히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이런 시기에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희망찬 내일을, 그리고 국가의 운영방향을
공표하는 일은 언뜻 당연하고도 바람직해 보인다.

대통령이 조망한 미래 한국의 비전과 국정방향에는, 비록 각론상 논의의
여지가 있더라도, 국민 모두가 승복하고 협조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경축사를 듣는 중에 몇 가지 상념이 일어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언제쯤에나 대통령의 "한 말씀"으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국가발전단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인가.

대통령은 시중의 이자율을 내려야 한다고, 자동차 공장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동강댐 건설에 대해 한마디하면 그동안 시끄러웠던 시민, 전문가,
환경주의자들의 논쟁이 일순에 무색해진다.

이번에 국가의 운영방향에 대해 말씀했으니 그것으로 국정은 확정됐다.

앞으로 각 부처에서 봇물 터지듯 대책이 쏟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의 국회는 과연 이와 같은 문제를 진정하게 논의할 자질을 갖춘
국민대의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제도와 원칙이 지배하는 시장이 정치인 대신에 재벌의 진퇴와 산업구조의
형성을 결정하는 시대는 언제 올 것인가.

새 밀레니엄의 국가적 과제 중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둘째, 공짜로 얻어지는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IMF 경제위기도 공짜로 극복되지 않았다.

금융구조개혁을 위해 이미 64조원의 공적 자금이 배정되었고 이것은 앞으로
더 늘어날지 모른다.

올해 예산의 적자규모도 20조원이 넘는데, 이 정부에선 선심성 재정지출이
늘어만 간다.

대통령이 밝힌 생산적 복지사회의 건설에도 물론 돈이 든다.

그러므로 성실한 정부라면 아름다운 미래로 가기 위해 국민이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서 밝혀야 한다.

후손이 짊어질 공공부채의 전망이 어떠할 것이고, 정부는 이를 줄이려는
노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털어놓아야 한다.

뭐니뭐니 해도 오늘날 우리경제의 최대 현안은 대우 사태를 처리하는
것이다.

대우의 부채문제는 우리경제를 옭죄는 속병이었으므로 그나마 뒤늦게라도
터뜨려진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대우문제가 지금까지도 숨겨져 있었다면 대통령의 "8.15 설계"는 공염불같이
허무하게 들렸을 것이다.

앞으로 대우그룹 처리과정이 국민소득이고 채권국이고 간에 한국경제의
앞날을 좌우하는 변수가 될 것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대통령은 대우그룹을 제2의 기아사태와 같은 일이 절대로 없도록 엄정히
처리하겠다고 한마디로 단언했다.

그러나 이 기업의 문제는 오랫동안 처리가 미루어짐으로써 그 부채규모가
엄청나게 증대되는 결과를 이미 초래했다.

최근의 구조개혁 과정에서도 원칙과 방법이 오락가락함으로써 향후 처리에
대한 신뢰도에 당국 스스로 흠집을 냈다.

국민들은 왜 대우그룹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부채의 처리가
어떻게 국민부담으로 귀결될 것인지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대우그룹의 처리는 대통령이 공약하는 재벌개혁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이 기회에 대통령의 선언 이상을 들을 수 있었다면 대우처리와 재벌개혁의
장래, 그리고 새 시대 복지사회 도래에 대한 8.15 약속은 더욱 믿음직한
목소리로 우리의 귀를 울렸을 것이다.

이번 광복절에도 어김없이 특별사면이 이뤄졌다.

해가 바뀌면 또 새 밀레니엄이 시작됐다는 구실 아래 대규모의 사면은전이
내려질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법을 어기는 자가 이득을 보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단순한 사기, 부도에서 시작해 횡령, 뇌물수수, 권력형 부정에 이르기까지
경제범죄가 다반사로 자행되고 있다.

운 나쁘게 잡히는 범법자도 크게 다치지 않는 사회 아닌가.

대통령은 "반부패특별위원회"까지 두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잡아들인들
모두 다 풀어주고 복권시켜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새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법의 권위를 제 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진짜로 질서를 지키고 정직한 사람이
승리하는 사회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 kimyb@cau.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