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1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성명회선언서"
란 문서 한 질이 보관돼 있다.

1919년8월26일 불문으로 작성된 문서에는 연해주로 망명했던 유인석 이상윤
이상설 등 의병, 애국계몽운동가, 연해주 한인사회지도자 8천6백24명의
서명도 첨부돼 있다.

이 문서는 국망과 동시에 발표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변하는 최초의
합병무효선언, 민족적 혈전선언 이었고 항일독립선언의 원류가 된 귀중한
자료가운데 하나다.

1910년8월초에 이미 외신을 통해 한일합병소식을 알고 있었던 연해주의
민족운동가들은 1910년 8월23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한민학교에서
한일대회를 열어 유인석을 총대로 하는 성명회를 조직하고 이어 각국에
선언서를 발송했다.

성명회의 총대는 의병장 유인석이 맡았다.

한인 개척지의 시발이 된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카레이스카야(고려인촌)
이었지만 1909년께 페스트가 창궐하자 러시아 정부는 7백세대 모두를 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신한촌''은 이후 한인사회의 중심지로서 항일기지가 된다.

유인석이 13도의군을 편성해 최후의 구국전을 시도한 곳도 이곳이었다.

1911~14년 독립군 양성과 대한광복군정부 건립에 힘쓴 권업회활동, 대한
인국민회활동도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19년 3월17일 신한촌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선언 축하식과 시위운동은
전연해주 지역으로 파급됐다.

상해 임정보다 앞서 출범한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의 임정은 대한민국임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임정통합이 의논됐던 것도 신한촌 한민학교였다.

이곳은 또 고려공산당이 조직돼 한국근현대사에서 공산주의라는 복잡한
이념을 제기한 연원지이기도 하다.

엊그제 광복절을 맞아 연해주 신한촌에서는 해외한민족연구회가3.1운동
기념탑 제막식을 갖고 신한촌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재조명
하는 학술회의를 열었다는 소식이다.

연해주 한인의 민족운동 독립운동 공산주의운동은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일면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이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부여할 때가 된것 같다.

어느 누구보다 1937년 이곳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러시아의 40만
동포에게도 뜻깊은 고향소식이 됐으면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