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쓴 소설 초고를 꺼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우고 다시 쓴다.

그러다가 어느 문장에서 후끈 마음이 뜨거워진다.

내가 어떻게 저렇게 천박하게 썼지?

나는 본질적으로 천박한 사람인가?

인정하기 싫다.

그래서 쓰기를 그만둔다.

부끄럽지만 내 안의 천박함을 찾아보려 노력한다.

마침내 찾는다.

"조급함"이 원인이었다.

조급함은 욕심에서 왔다.

욕심은 열등감이 씨앗이다.

소설가의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는 이렇게 글 속에 자신의 진정한 상태가
고스란히 들어 나는 걸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가로만 사는 게 아니다.

어머니이다.

자식들에게서 내가 보인다.

아이가 잘하면 무조건 기쁘고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보다 고통이 더 오래 간다.

아이가 불성실하거나 불건강하거나 당당하지 못할 땐 화가 나고 괴롭고
싫다.

왜 그럴까.

그 아이의 현재 속에 내 과거가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릴 때 나는 어머니로서 불성실하고 불건강하고 비굴했던 것이다.

마땅히 보살피고 돌봐줘야 할 때 소설 쓴다고 아이를 귀찮아했다.

아이 아버지와 그 식구들에게 당당하지 못했다.

여자로서 자신을 비하했다.

당연히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희생과 자기 존중이 다르다는 걸 그땐 몰랐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어렸을 때의 나를 설명한다.

불충분한 사람으로서 어머니 노릇을 하며 알게 모르게 저지른 죄에 대해.

아이들이 이해하면 다행이다.

살면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도 오십이 넘은 지금 어느 순간 문득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 인연에 대해
이해하니까.

남편 속에 내가 있다.

그 남자 속에 들어 있는 나의 누추함과 불건강과 불행이 보인다.

슬픈 일이다.

그 슬픔을 극복하는 일은 성장기의 나,그때의 환경과 시대를 이해하고
감싸안고 사랑하는 일이다.

또한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에서의 살아남기를 배운다.

낯선 곳의 타인들 속에 내가 있다.

나의 우월감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지구에 사는 60억명중의 하나일
뿐인 내가 보잘것 없다는 것,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살지 않으면 부끄럽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소박함의 미덕에 머리 숙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