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직업이 전업작가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을 돌아다닐 일이
많다.

겨울부터 시작한다면, 대관령이든 한계령이든 진부령이든 첫 눈이 내렸다는
소리만 들리면 다음날로 나는 그곳에 간다.

폭설이 내렸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내 어린 기억 속에 우리의 키높이만큼 눈이 내리고 쌓였던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그때의 눈과 지금의 눈을 비교한다.

봄이 되어도 나는 자주 돌아다닌다.

벚꽃이야 어디서나 피니까 굳이 그렇게 먼 걸음을 할 일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쌍계사 가는 길의 그 벚꽃길은 잊을 수가 없다) 배꽃이 필 때면
매년 가지는 못해도 이태에 한 번씩은 꼭 전남 나주로 배꽃 여행을 떠난다.

해마다 그 높이의 그 가지에서 피는 꽃이지만 봄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다르다.

아이들이 방학한 여름에도 나는 나무와 들풀을 찾아 낯선 산과 낯선 마을로
여행을 다닌다.

내 손으로 운전을 한 게 10년이 넘는데 나는 아직 우리나라 승용차의 이름을
절반도 모른다.

새로 나온 자동차는 더욱 그렇다.

내 눈엔 크기가 비슷한 자동차들은 모두 그 차가 그 차 같다.

옆 차선으로 휙휙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보고 저것은 무슨 자동차다, 또
저것은 무슨 자동차다 하고 말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그것을 금방 알까 참으로 신기하다.

그게 신기해 다른 사람에게 말했더니 그 사람도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었다.

운전을 10년도 넘게 했다면서 대체 눈썰미가 그 정도밖에 안되느냐고.

웬만하면 다들 그렇게 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이나 들에 가면 사정은 금방 달라진다.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은 나무들을 나는 귀신처럼 구분해낸다.

그건 나뭇잎이 다 떨어진 가을산이나 겨울산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간 일행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나무 줄기만 보고도 이건 갈나무, 이건
참나무, 이건 상수리나무, 이건 산뽕나무, 이건 닥나무, 이건 오리나무,
이건 졸참나무, 그리고 이건 자작나무 하는 식으로 줄줄이 나무 이름을
가르쳐주고 그 나무들을 다른 나무들과 구분하는 법을 일러준다.

어쩌면 그건 아주 오래된 어떤 자동차의 89년식과 90년식을 구분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전생에 나무꾼이 아니었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나무를 만나러 가는 산 여행이나 들길 여행은 내게 일종의 테마 여행인
셈이다.

어느 마을 어느 들길을 걸어도 나무를 만나고 그 길가의 들풀을 만난다.

그러면서 이 마을 저 마을 풍광을 살피고 그 마을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는 재미도 여간 쏠쏠하지 않다.

그러다 시골 장터라도 만나게 되면 아예 한나절을 그 자리에서 죽친다.

언제부턴가 안타까운 꼴들을 하나씩 만나기 시작했다.

개발처럼 편리한 것도 없지만 개발처럼 흉악스러운 것도 없다는 걸 이즈음
여행 때마다 느낀다.

가는 곳마다 온통 새로운 관광지 개발뿐이다.

"문화"라는 게 정말 문제다.

시대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입맛대로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예전의 "대한뉴스"처럼 문화가 정권 홍보에 필요하던 시절엔 문화공보부라는
게 있었고, 그게 한구멍으로 체육에 모아져야 하면 문화체육부가 되고,
그러다 지금처럼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식으로 모든 게 관광으로 연결될 땐
또 문화관광부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다녀보면 정말 징글징글하다.

입만 벙긋하면 문화, 문화 하는데 그 문화도 딱 두 종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관광으로 연결돼 돈이 되는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

특히 음악 미술 문학 같은 분야는 산업으로도 연결되지 않고 또 관광으로
연결되지도 않아 돈 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문화로 치부
되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이게 "문화 관광"인지 "문화 강간"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멀쩡한 문화유적 옆에 문화유적 안내보다는 무슨 드라마 촬영장소, 무슨
드라마 신혼여행지, 무슨 드라마 촬영팀 투숙 호텔, 또 무슨 방송국 선정
맛있는 식당 하는 식의 간판들을 줄줄이 붙여놓기도 한다.

또 그게 아니면 관광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한 산 허리를 파내고
계곡을 들쑤셔 그 자리에 줄줄이 가든(음식점)과 파크(러브호텔)를 지어
국민들 모두 가든에서 밥을 먹고 파크에서 잠을 자게 만든다.

그래, 긴 말 할 것 없이 어쩌면 그게 후손들에게 물려줄 우리시대의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발 문화라는 이름으로 더이상 문화를 강간하지 말라.

말 그대로 문화는 문화고, 관광은 관광인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