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재 <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연구위원 >

전임 대통령들의 모스크바 방문은 다소 들뜬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은 매우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방문의 의미도 주로 외교 안보적 측면에 비중이 두어지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 방문으로 김대통령은 취임 이래 추진해온 한반도 주변 4강에 대한
외교를 마무리지음으로써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확고한 국제적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상회담이 지난 94년 김영삼 전대통령의 방러 이후 5년만에 처음
열린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한.러관계가 얼마나 소원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일 게다.

4자회담에서 러시아가 제외됨에 따라 악화되기 시작한 한.러관계는 작년
정보관련자의 추방사태를 계기로 최저점에 도달했다.

게다가 97년과 98년 연이어 발생한 한국과 러시아의 금융위기는 국교정상화
이후 확대 발전돼 온 한.러경협의 상승세마저도 반전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현재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어려우며 향후 전망도 상당히
불투명한 상태다.

지속적으로 불안한 양상을 보여온 러시아 정국은 최근 또다시 대통령과
의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옐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부결되고 스테파신 신임총리에 대한
인준이 통과됨으로써 최악의 사태는 모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는 12월의 총선을 앞두고 러시아정국이 혼란에 빠질 수 있는
요인들은 상존해 있다.

옐친 대통령의 건강상태도 이러한 불안요소중 하나다.

러시아 경제사정도 정치상황에 비해 나을 게 없다.

92년 러시아정부가 경제개혁에 착수한 이래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는 현재 개혁이전의 절반수준으로 축소됐다.

러시아는 97년 경제개혁 이후 처음으로 약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나,
금융위기에 휩싸이면서 작년 8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됐다.

러시아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한국이 진정 러시아를 가까운 이웃으로 여기고
있으며 러시아와의 협력관계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푸쉬킨의 시, 톨스토이의 소설과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고 있는지를 러시아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또 우리는 체제전환중 러시아 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저하로 인해 받은 상처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아울러 이번 김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을 통해 한국 국민은 광활한 영토,
무궁한 부존자원,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지닌 러시아가 머지않아 당면해
있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점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난 몇 년간 한국인들이 러시아를 경시한다고 여겼던
러시아인들의 인식을 불식시키고 양국 국민간 신뢰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또 김대통령의 이번 방문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이 러시아와의 협력 실상을
파악하고 그 중요성을 재인식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한국언론에 비친 러시아는 부정적 이미지 일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러시아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 예컨대 러시아내에서 한국상품의
이미지가 세계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 등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더욱 균형된 시각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20세기의 상당 기간중 러시아는 우리에게 협력상대라기 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 한국과 러시아간 본격적인 협력시대가
전개될 21세기를 위해 하나의 기반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