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국수습대책위원회 구성 ]


한국경제인협회는 63년 3월22일 국민에게 "항산과 항심"을 갖게 하자는
"정국수습에 대한 결의"가 여론의 호응을 얻자 25일 임시총회를 열고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

이정림 이한원 홍재선 남궁련 김용성 이도영 심상준 김영식 등 8명을
수습위원으로 선출했다.

임시총회는 이들 수습위원들이 박정희 윤보선 허정 등 여야지도자들을
예방해 속히 혼란을 진정시킬 것을 강력히 건의키로 했다.

이날 총회 직후 경제인협회는 "시국수습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경제계가 "8인 수습위원회"를 통해 긴박한 정국 해결을 위해 "거중조정"에
나설 것을 공식 표명했다.

이 거중조정 결의문이 발표되자, 일간지와 월간지 기자들이 사무국장인 내게
대거 몰려왔다.

모두들 "무슨 힘이 있다고 거중조정이냐"고 물었다.

도대체 해결할 묘안이 있는 건지, 누구를 만날 것인지 등등 질문이
쏟아졌다.

심지에 개 중에는 "경제인들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가시돋힌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당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어느 사회나 권력투쟁은 있는 법이다.

이럴 때 정계 아닌 여타 분야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특히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에선 이 문제는 중요하다.

여와 야라는 큰 바위같은 거대 세력이 정면충돌하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것이다.

이때 비정치분야의 여러 조직체들이 소신을 갖고 끼어들면 여야라는 큰 돌
사이에 작은 돌맹이가 돼 정면충돌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힘이 세고 약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신있는 참여 자체가 정국안정
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원사회" 조직체의 역할이다.

기자들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경제계의 거중조정의 효과에 대해서는
의구심은 여전한 듯 했다.

4월1일 시국수습 8인위원회는 먼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부터 만났다.

박 의장의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달랐다.

그간 심적 고뇌가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수습위원들은 경제계가 불안해하고 있고 산업은 침체 일로에 있다고
돌아가며 설명했다.

특히 국민들의 생업까지 완전히 없어질 위기상황에 빠졌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박의장은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의 염려를 덜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입니다. 야당 정치
지도자들도 만나주십시오"

박 의장실을 나오면서 보니 수습위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밝은
표정이었다.

"희망의 싹이 보인다"는 신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해서 나중에 만나기로 하고 4월2일
허정 전 내각수반을 찾아갔다.

그는 우리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차분하게 설득조로 정세 해설을 했다.

기업인들이 잘 모르는 얘기도 들려줬다.

그는 미국 케네디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그 배경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절대 군정 연장을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오히려 "경제인들이 박 의장 주변인물들을 하나씩 붙들고 설득해달라"
고 부탁했다.

수습위원들은 혹 떼러 갔다가 붙인 격으로 그의 집을 나왔다.

허정 전 수반은 미국 정치에 대해 밝은데다 나름의 정국수습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인들로서도 어떻게 설득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범석 장군(전 국무총리)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사냥 중 다친 다리 때문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작은 온돌방에 꽉찬 당당한 체구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난다.

이 장군은 나라일 보다는 사냥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당시는 물론 이전부터 "명사수"라는 평판이 자자했던 이 장군은 자신이 총을
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36년 윤봉길의사의 의거후 일본군은 첩보망을 총동원해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됐다.

그래서 이들 지도자들은 감시망을 피해 강이나 산간벽지로 피신했다.

당시 이 장군은 중국본토에 숨어 있을 수 없어 내몽고 오지 사막으로
피했다.

그러니 먹을 것을 얻으려면 사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취미가 아니라 먹기 위해 사냥을 하다 보니 백발백중 명사수가 됐다는
설명이었다.

이 장군은 총 자랑이 너무 길어졌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박정희를 만나면 선거로 떳떳이 겨루라고 하겠소.그 길밖에 없다고 내가
분명히 얘기할 겁니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시 나는 "지금도 저렇게 건장한 체구인데 중국에서 광복군 지대장을
했을 때는 얼마나 위풍이 당당했을까"를 상상하면서 다음 방문처인 변영태
전 외무장관 집으로 향했다.

벌써 오후 7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방안은 어둑어둑했다.

한평 반쯤 되는 작은 방의 장판은 여기저기 땜질 투성이었다.

깡마른 작은 체구였다.

방안에는 눈에 띠는 가구도 없었다.

하기야 외무장관 시절 해외출장비 5달러 50센트를 남겨 국고에 반납, 신문
가십에 오른 그다.

그는 "이 나라의 고질인 부패를 일소할 정치가는 나밖에 없다"며 대통령
선거가 있으면 새 정당을 만들어 출마하겠다고 말했다.

여야 지도자들을 두루 만나면서 경제계의 위상은 높혔지만 정국 수습에 대한
가닥은 잡히지 않았다.

수습위원들은 미국의 "진의"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 4월9일에 킬렌
USOM(미국대외원조기관) 처장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정말로 군정이 연장되면 원조를 중단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