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파나마 국적의 대형 탱크선이 원유를 가득 실고 울산항에
정박해 하역작업을 할 때의 일이다.

해저에 설치된 파이프 라인을 이용해 육지의 탱크로 원유를 옮기던중
갑자기 배가 후진, 파이프가 고장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파이프를 즉시 봉쇄해 급한 불은 껐지만 누가 사고에 따른 손실을
책임지느냐는 문제가 남았다.

선박업체는 책임질수 없다고 떼를 썼고 원유 도입사인 SK주식회사는 당연히
선사가 손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자칫 지루한 법정소송으로까지 이어질뻔 했던 이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됐다.

그 해결사가 바로 SK(주)의 인하우스(In-House.기업소속) 변호사인 황석진
(39) 국제법무팀장이다.

그는 시비가 커지면 해결하기 점점 어려워진다고 판단, 선사로부터 즉각
사실진술서를 받는 한편 이를 선박보험회사인 P&I에 보내 보상을 받아냈다.

"기업 경영활동엔 수많은 법률적 검토가 요청됩니다. 보통은 외부 변호사를
위촉하는 방법을 활용하지만 법적인 측면보다는 기술이나 사업내용이 더
중요한 사항인 경우 내부 법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황 팀장은 인하우스 변호사가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종의 기업 경영 리스크(위험) 분산자라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3가지로 나눠볼수 있다.

첫째는 원유도입및 유화제품 수출(트레이딩)분야, 두번째는 M&A(매수합병)를
포함한 구조조정, 셋째는 공장설립과 관련한 라이선스 계약이다.

우선 원유도입이나 유화제품 수출과 관련한 법적인 문제를 담당한다.

SK(주)가 정제하는 원유는 하루 70만~80만배럴.

연간 3억배럴 가까운 원유를 들여온다.

들여오는 물량이 많은만큼 사고도 종종 일어난다.

산유국서 원유 선적전 테스트한 원유 샘플과 실제 도착한 원유간 품질
차이에서 야기되는 문제, 해상및 원유하역 작업시 사고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때마다 이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곳이 바로 황 변호사가 이끄는 국제법무팀
이다.

구조조정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에너지업체 엔론사와의 합작계약이 성사되기까진 그의
노력이 컸다.

97년말 황 변호사는 최태원 현 회장으로부터 은밀한 지시를 받는다.

가스 사업 분야에서 외자를 유치하는 "G프로젝트"를 추진중인데 법적인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라는 것이었다.

엔론측 인하우스 변호사인 보닝 넬슨과 만나기 수십차례.

SK가 벌이고 있는 가스 사업의 자산가치를 얼마로 평가할 것인지, 그리고
만약 계약서와 다른 내용이 발견될 경우 누가 얼마나 책임을 지는지가
협상의 초점이었다.

1년동안의 지루한 협상과정을 거쳐 SK(주)는 지난해 12월 마침내 3억달러
규모의 합작계약서에 서명할수 있게 됐다.

계약서 분량만 수백페이지에 달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하우스 변호사의 역할은 여러가지 경우를 상정해
각각마다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는 일입니다. 최고
경영자는 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되죠. 말하자면 경영의사 결정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엔론과의 합작 외에도 현재 서너건의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여기엔 국내 쌍용정유 인수건도 포함돼 있다.

공장 설립과 관련한 라이선스 계약도 빼놓을 수 없는 일중 하나다.

보통 1조원가량이 들어가는 정유공장 하나를 지으려면 최소한 4건이상의
특허계약이 필요하다.

원천 특허를 갖고 있는 업체와 특허 사용 계약을 맺어야 하며 외국
엔지니어링업체, 국내 엔지니어링 업체와 차례대로 계약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황 변호사의 일은 짓고자 하는 공장의 설비가 계약서 내용에
정확히 반영돼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회사 사업 내용을 잘 아는 인하우스 변호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96년 울산 파라자일렌 2공장 건립때의 일이다.

당시 김항덕 부회장은 황 팀장에 공장건설 방식을 턴키 방식에서 자재를
부분발주해 조립하는 형식으로 바꾸기로 했다며 엔지니어링업체인 미
레이시온과 맺게될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황 변호사는 즉시 미사일업체로 유명한 레이시온 본사가 위치한 미 보스톤
으로 날아가 레이시온의 인하우스 변호사인 마크 트렘블리와 밤샘작업을
했다.

10여일만에 1백쪽이 넘는 계약서 작성에 성공할수 있었다.

황 변호사는 회사에 봉사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미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증을 딸수 있었던게 순전히 회사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SK(주)는 법무를 담당하던 황씨를 88년 미국으로 보내 4년동안 뉴욕
유니버시티 로스쿨과 노트르담 로스쿨에서 정통 법학을 공부할수 있도록
도왔다.

황 변호사가 사례중심의 국제계약 지침서를 발간하고 틈틈이 사내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법 경영 지식 확산에 나서고 있는 것도 회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 강현철 기자 hckang@ >


[ 특별취재팀 = 최필규 산업1부장(팀장)/
김정호 채자영 강현철 이익원 권영설 이심기(산업1부)
노혜령(산업2부) 김문권(사회1부) 육동인(사회2부)
윤성민(유통부) 김태철(증권부) 류성(정보통신부)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