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한EU(유럽연합)상공회
의소 재팬클럽 등 주한 외국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를 잇달아 열었다.

한국 기업들의 구조조정 계획을 설명하고 외국인 투자환경 개선을 위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외국인들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한국인들의 배타의식 때문에 투자하기가 "겁난다"는 것이었다.

어떤 외국인은 "교통경찰들이 수입차를 타고 다니면 더 심하게 단속한다"고
꼬집었다.

"학교에서 외제문구를 쓰면 친구들에게 망신을 주는 일까지 벌어진다"며
흥분하는 이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우리 사회분위기는 국산품애용 운동이 지나쳐 외국인과
외국기업을 배척하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자본을 곱잖은 눈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외국기업에 우리 기업을 다 내주면 우리는 "하청기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란 지적들이 많았다.

특히 일부 시민단체들은 공기업을 외국에 내주는 일은 재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년여가 지난 지금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외자유치가 IMF체제 극복을 위한 중대한 방안의
하나로 인식된 이후 외국자본은 곧 선이 됐다.

그동안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에 투자할 만한 기업이면 방한하는 회장이나
사장을 가리지 않고 청와대로 초청하는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제부처들도 외국기업에 장애가 되는 규제들은 국내 기업들이 "역차별"이란
지적을 물리치고 과감히 풀어줬다.

기업들의 자세도 많이 변했다.

피해의식은 버린지 오래다.

구조조정을 위해서라면 흑자사업이라도 외국기업에 팔았다.

대상이 라이신사업을, 동양화학이 농약사업을 매각한 것이 대표적 예다.

주인을 바꿔서라도 회사명맥을 유지하고 종업원을 살리려는 기업들도
많았다.

그 결과 IMF 체제 1년여만에 신문용지 시장은 외국기업이 73%를 점유하고
있다.

종묘는 업계 1~3위가 모두 외국계 기업이다.

농약도 56%의 시장을 외국자본이 점유하고 있다.

살충제와 건전지 시장의 경우도 국내 1위 업체들의 주인이 모두 외국인으로
바뀌었다.

산업자원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투자(신고기준)는 1천3백98건,
88억5천2백만 달러에 달했다.

97년에 비해 각각 32.5% 27.0% 늘어난 수치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완전히 벗어나는 동시에 새로운 성장기반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유치를 더욱 가속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양적 팽창 가능성이 적어진 제조업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고
보고 있다.

우선 외국기업과의 합작 제휴 등을 통해 우리 기업들이 선진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기업 체질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개선하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초일류 기업과 함께 일하며 배우는 것이 첩경이다.

실업 발생을 억제하고 기술 맨파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독일 바스프사는 IMF체제 이후 합작회사였던 한화바스프우레탄과 효성
바스프등의 한국측 지분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종업원을 전원 고용승계했다.

대상으로부터 라이신사업을 인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외국기업들이 생산직을 중심으로 한 기존 종업원들의 고용보장에는
우호적이다.

주인은 바뀌어도 일자리는 남고 인적자원은 계속 유지 발전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외국자본은 이와 함께 각 기업의 재무구조 견실화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동양화학의 경우에는 비핵심사업을 합작파트너를 중심으로 한 외국기업에
넘기면서 부채비율 2백% 이하 축소 목표를 일찌감치 달성했다.

남아있는 계열사의 기업가치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나라 전체로 보더라도 기업부문 구조조정이 촉진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초일류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외신인도 제고에
엄청난 보탬이 된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한국을 아시아 생산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다국적 기업들이 늘고 있다"며 "외국기업과의 합작과 제휴, 경쟁을 통해
한국 제조업을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2일자 ).